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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Oct 13. 2019

화이트폭스의 오리진 스토리: 고등학생 한아미를 만나다

퓨처 파이트 퍼스트즈: 화이트 폭스 #1 리뷰

손꼽아 기다리던 <퓨처 파이트 퍼스트즈> 원샷이 발매됐습니다. 첫타자는 데뷔순서로도 왕언니인 화이트폭스가 나서줍니다. 이 시리즈는 <에이전트 오브 아틀라스> 시리즈와 '마블 퓨처 파이트' 모바일게임 두 작품의 프로모션을 동시에 해주는 일석이조 책이에요. 이제 막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는 한국인 캐릭터들의 오리진 스토리를 다룹니다. 화이트폭스는 해외에 코스프레도 하고 펀코팝 커스텀 작업도 하는 등 조금조금씩 팬층을 쌓아가는게 보이거든요. 서사를 준다면야 기쁘게 날뛰는 것이 바람직한 팬걸의 소양 아니겠어요. 전반적으로 오리진 원샷의 맡은바 소임을 아주 충실하게 해내는 작품이었어요. 어색하거나 과장된 부분 없이 액션과 떡밥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죠. 

'에이전트 오브 아틀라스'를 꾸리고 있는 리더 지미 우가 미스터 라오라는 용과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자연스러우면서도 재밌는 인트로덕션이라고 생각했어요. 말하는 용이라는 캐릭터가 "화이트폭스는 구미호이고 구미호는 괴물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라는 게 아이러니하잖아요. 구글에 검색해보니 이 양반은 본래 인간이었고 저주를 받아 용의 모습이 되어서 아틀라스를 지원해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약간은 이해가 돼요. 아무튼 한가지 의문점으로 시작하죠. "과연 구미호 한아미를 믿을 수 있는가?" 그 뒤에 이어지는 스토리는 이 질문에 YES 혹은 NO로 대답하는 꼴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미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살펴봅니다. 아미가 소싯적에 배구했다는 설정 대체 누가 짜낸 거야, 정말 잘했어! 아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새로 전학을 온 상태라 기존의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상황인데요. 고등학교 3학년에 전학을 다닐 이유가 뭘지 너무 궁금하지만 그래도 아미가 본질적으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배척받고 떠도는 외톨이 설정을 잘 부각시켜주었다고 생각해요.

팬서비스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주는 이슈였어요. 과거회상으로 엄마(UMMA 음차표기 최고!)가 살아계셨을 때의 새끼 시절 아미를 볼 수 있다니 돈이 한푼도 아깝지 않다. 단발 꼬맹이 아미를 보니까 다른 여우 계열 캐릭터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요랑아 요랑아> 요랑이랑 <천년여우 여우비>의 여우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아리, 그리고 화이트폭스 아미 이렇게 여우들 넷이서 만나면 하루종일 여우 썰을 풀 수 있을 거 같아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네 사람 전부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있네요!ㅎㅎ)

정말 훌륭한 캐릭터는 바로 아미의 유일한 친구 설예지였다고 봐요. 예지는 아미의 두 가지 세계, 얌전한 인간소녀로서의 일상과 마지막 남은 구미호 요물로서의 비일상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해주거든요. 민속설화 도서부 소속으로 (대다수의 미국인 독자들을 위해) 구미호와 삼족구 전설을 소개해주고, 또한 아미가 위장을 포기하고 진실된 본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위기에 처해서 서사 진행에 발단을 제공해줘요. 이 친구가 아니면 이야기 전개가 전혀 불가능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장기말이었습니다. 일진 vs. 너드 대치구도를 써먹고 있는 건 좀 지루하긴 했지만, 예지와 아미의 언더독 정체성을 묘사하기에 경제적이고 실용적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구미호는 여우 괴물이었대. 아름다운 여인으로 모습을 바꿔서 남자들을 유혹한대. 그리고는 심장을 뜯어내서 먹어치운다는 거야!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긴 한데, 한국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은 한가지만큼은 일맥상통해. 구미호는 사악하다는 거야. 글쎄에, 난 그부분은 잘 모르겠어. 남자들 입장에서야,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를 사악하다고 말하고 다니겠지. (...) 자기 잘못도 아닌데 꼬투리 잡혀서 평가받는 기분이 뭔지 나도 알거든."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바로 이 대목의 대사. 예지는 구미호가 허구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간단하고도 냉철하게 진실을 꿰뚫어보고 있어요. 역사속에서 마녀사냥 당하고 스러진 '악녀'와 '요녀'들은 사실은 평범한 인간이었고 그들이 죽임당한 것은 단순히 사회가 요구하던 정상성에서 벗어나 사회의 정형성을 위협했던 특이한 개인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들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중세 마녀들이 낙인찍혔던 이유는 정상의 규범에서 벗어나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해 경제활동을 하는 등 가부장제 시스템을 위협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에요. 예지의 대사는 그런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죠.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고, 민속설화 역시 남성의 시선으로 구미호를 묘사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저는 요즘 '공감'이라는 키워드에 완전히 꽂혀있는데 여기서도 그렇게 보여요. 사악하다고 손가락질받는 전설 속 구미호에게 '아버지의 빚에 관한 소문 때문에 따돌림 받는 나'를 발견하고 공감과 연민을 내비치는 부분이 좋아요. 여성들 간의 연대라면 저는 좋아 죽거든요.


한편 "한국의 구미호 전설은 모두 구미호를 사악한 존재로 묘사한다"라는 말이 사실인지 순수하게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이번 이슈에 핵심 소재인 '삼족구'도 저는 여기서 처음 봤거든요. 구미호의 천적이 삼족구라는 거 여러분도 아셨어요? 저는 몰랐어요.

'여우구슬'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발췌; 

특징: ('여우구슬') 문헌설화에 보이는 여우는 서사 전개상 한 기능을 담당할 뿐이며, 부정적 관념의 표상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는 부정적 표상인 여우의 연원을 살피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거타지설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한국의 여우설화에서 파악되는 가장 오래된 변신 여우이기도 하다. 구전설화에서 보이는 여우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며, 부정적 관념의 표상뿐 아니라 긍정적 관념의 표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의의: 여우는 동아시아의 구비문학, 기록문학에서 다수 등장하는 동물이다. 중국과 일본의 자료에서는 대체로 매혹적 여성, 지혜로운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한국의 자료에서는 부정적 이미지가 더 강하다.

설화 속 동물이 다 그렇듯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양하게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호랑이를 생각해봐요), 여우의 경우 부정적인 이미지가 좀더 강한게 맞다고 하네요. 와우. 작가가 조사를 진짜 열심히 한 모양이에요. 기특해요 '참 잘했어요' 도장 쾅!

구미호의 천적이라는 삼족구 역시 휴머노이드 형태의 캐릭터로 소개됩니다. 조직폭력배 용산브라더스(우우~)의 앞잡이 김경태씨. 검은 옷을 빼입은 엑스트라 군중에 비해 눈에 쏙 들어오는 빨간 정장에다가 가슴에 삼족구 타투까지. 위험예지 능력을 쓸 때 눈동자가 짐승처럼 세로로 찢어지는 것하며. "이 캐릭터는 뭔가 특별해. 주목할만한 게 있어." 라는 인상이 팍팍 와닿는 비주얼묘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실제로 아미의 엄마를 사냥해 죽인 범인이었다고 하니, 아미 입장에선 일생의 네메시스잖아요. 삼족구 경태와 구미호 아미의 1:1 정면승부는 이슈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액션이 굉장히 잘 빠졌습니다.

아미가 능력을 쓸 때마다 머리카락 염색이 없어지고 본래의 흰머리가 돌아온다는 설정이 마음에 들어요. 숨기려고 애를 써도 본래 나 자신의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예지를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용산브라더스 패거리를 해치워버린 아미의 능력에 여성 국정원 국장이 단박에 스카우트를 제의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해서 국정원 화이트폭스가 시작되었노라" 라는 거지요. 

아예 괴물이 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착한 괴물이 되는 게 더 낫다.

이슈를 닫는 모놀로그도 완벽해요. 엄마를 잃고 인간들 사이에서 정체를 숨기고 사느라 힘들었을 아미가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고 자신의 비인간성을 완전하게 받아들인 뒤에 하는 말이라서 더더욱 강렬하게 힘을 갖고 있어요. 훌륭한 메시지를 담은 고퀄리티 원샷이었습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몇번을 다시 읽었는지 몰라요. 작가 이름을 처음 봐서 구글에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중국&필리핀계 미국인 여성 작가입니다. 여성이 쓰는 여성캐릭터 책은 이쯤 되면 보장된 백지수표 같은 거 아닌지. 시리즈 나머지 원샷들, 루나 스노우와 크레센트&이오 책도 역시 알리사 웡이 집필합니다. 완전 안심돼요. 수상경력도 엄청난데 쭉쭉 계속해서 마블코믹스를 써줬으면 좋겠어요. 얼마든지 읽고 싶어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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