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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Nov 01. 2020

일상과 비일상, 빛과 어둠, 인간과 저주

주술회전 1화 리뷰

본 리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는 시간 날 때마다 일본 아니메를 종종 찾아 보는 편입니다. 나이든 오타쿠의 취향은 과거에만 머물고 있어서 좀처럼 마음에 드는 신작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는데요. 친구의 추천 덕분에 굉장히 흥미로운 아니메를 만나게 되었네요. 오늘은 이곳 지면에 다소 두서없이 아니메 감상문을 적어볼까 합니다. 요즘 그렇게 핫하다는 만화영화 <주술회전>입니다. 


1편이 수행하는 역할은 코믹북이든 아니메든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먼저 주인공의 캐릭터 소개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극의 방향을 지시해주어야 하며, 갈등의 소재와 주요 키워드 정도는 나와주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화를 이어서 보게 만드는 원동력, Hook이 있어야 합니다. 낚시바늘처럼 독자/시청자를 줄줄이 꿰어 잡아당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해요. 과연 <주술회전>의 1화는 어땠을까요.


아주 수상한 방에 전신이 포박된 채로 갇혀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왜일까 궁금한 것도 잠시, 오프닝 주제가가 흘러나온 뒤 시간은 그로부터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문제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주인공. 흠흠... 호오... 별 저항 없이 극이 풀어주는 정보값들을 차차 수용하다보니 맨 처음에 포박 장면이 있었던 것도 잊게 되더군요. 그러다 1편의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면! 그제서야 그 오프닝 시퀀스가 click하고 와닿습니다. 주인공이 맞게되는 변화 때문에 그런 포박 장면을 초래하게 되었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지요. 저는 이런 이유로 1화를 다 보자마자 바로 2화로 넘어가지 않고 1화의 첫 시작으로 돌아가 재시청을 했습니다. 끝과 시작이 (네, 시작과 끝이 아니라 끝과 시작입니다.) 아주 완벽하게 맞물리는 구조의 1화였어요. 좋은 이야기를 만났을 때의 만족감이 가슴 속에 함양됩니다.


Q. 잠깐만요. 앞에서 1편이 수행하는 역할 어쩌구 했을 때 Hook은 '다음 편을 이어서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했잖아요. 지금 글쓴이는 거꾸로인데요. 제대로 된 1편 맞아요?

A. 그게 말이에요. 일단 들어보세요.

주술, 저주, 부적으로 가득찬 이공간
사토루 : 잘 잤어? 지금의 넌 어느 쪽이지?
유지 : 당신은 분명...
사토루 : 고죠 사토루. 주술고전에서 1학년을 담당하고 있지.
유지 : 주술... 후시구로... 선배! 이건 뭐야?
사토루 :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이타도리 유지. 너의 비밀 사형이 결정됐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에는 "1학년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람을 왜 '선배'라고 부르지? 라는 의문이 잠깐 들었었어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선배"라고 부르는 다른 사람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요.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주술고전"이나 "후시구로"라는 고유명사도 이제는 확실하게 의미를 찾아서 서사적 귀결성을 갖춥니다. 제목에 쓰여있다시피 이 만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주술, 또는 저주라고 할 수 있어요. 주술고전은 아마도 저주를 다루는 단체일 것이고, 높은 확률로 주인공은 이 단체에 소속 또는 배정되어 더욱 더 많고 다양한 저주를 맞닥트리게 된다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무엇보다 "지금의 넌 어느 쪽이지?"라는 대사는 주인공이 새로이 맞은 변화 그리고 주제가 영상의 마지막 파트와 함께 공명합니다. 

또 하나의 나

고대 희곡에서부터 셰익스피어를 지나 '지킬앤 하이드'와 같은 서구 현대소설까지 유구하게 반복해서 전해져온 보장된 맛집, '나 자신과의 싸움', 이중자아 모티프로군요. 너무 좋아라. 제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시고. 제가 좋아하는 슈퍼히어로 장르도 결국은 이중자아물로 요약할 수 있어요. 피터 파커 대 스파이더맨, 인간과 비인간, 일상과 비일상의 아슬아슬 아찔한 외줄타기. 정말. 최고. 따봉.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이야기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되, 하지만 억지나 무리라는 느낌은 받지 않게끔 영리한 구성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주술과 저주라는 비일상의 세계에 소속된 후시구로라는 캐릭터의 입장을 중간중간 적절하게 삽입해서 차곡차곡 갈등의 토대를 마련한 덕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이 할아버지의 죽음과 이어진 학급 친구의 위기를 통해 비일상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무척 좋았어요. 하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감행한 선택(손가락 꿀꺽)이 또 다른 위기를 낳는다는 개연성도 만족스럽고요. 일상과 비일상이 미묘하게 교차편집되다가 마침내 그 둘이 일체화되는 순간, 주인공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기나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건 뭐 시적이기까지 하죠.


그러면 <주술회전> 1화는 우리의 주인공, 이타도리 유지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해주고 있나요. 스포츠에 한해서는 일본은 커녕 세계 기록마저도 우습게 능가해버리는 초인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자격 요건(주력)이 없어도 저주라는 초자연적 현상과 주먹다짐을 할 수 있는 거려니 납득할 수 있어요. 만난지 두달 밖에 안 된 친구들이지만, 그래도 친구들이니까 구하러 몸을 던져 나서주는 인간미 있고 인정머리 가득한 성격을 보여주네요.


이 친구에게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듯해요. 병문안을 가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면서 오후 5시 하교를 고집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할아버지와의 짧은 대화에도 주목할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어딘가 수상한 할아버지의 유언

할아버지는 은은하지만 확실하게 주인공의 비범성을 강조해줍니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구해라, 인생의 마지막을 초라하게 맞이하지 말라"라는 말은 생각해보면 보통 무거운 책임이 아니에요. 평범한 사람에게는 도통 건네지 않을 말이죠. 손자에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동아리 활동이나 해!"라고 윽박질러요. 마치 주인공이 어떻게든 평범한 일상을 보내길 바라는 것처럼요. 거기에 더해 "사실 네 부모는..." 하고 주인공의 비범성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기까지 해요. 출생의 비밀이 있을 거라고 기대돼요. 과연 주인공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Hook이 강하게 발동됩니다. 파닥파닥.)

병문안 꽃다발 치고는 이상하다

처음 봤을 때는 별 생각 없이 넘겼던 부분인데 두번째로 감상하니 확실히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할아버지에게 병문안을 갈 때 사가는 꽃다발이 묘하게 화면에 많이 잡히는 듯한 기분이에요. 감독이 이 꽃으로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게다가, 꽃다발 안에 하얀색 꽃이 들어있지 뭐예요? 보통 꽃집에서 꽃을 사갈 때에는 그 용도를 묻곤 하잖아요. 병문안 용이라고 말했다면 꽃집 주인이 장례식에 쓰이는 국화와 같은 색의 꽃을 쓰진 않을 것 같습니다. 꽃다발은 할아버지를 향한 주인공의 마음 그 자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감독이 저 꽃을, 저 색깔을 고른 이유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알아봤어요. 그렇게 해서 주인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에요.

노란색 데이지: 순진, 명랑
노란색 장미: 우정, 영원한 사랑
흰색 카네이션: 추모
흰색 장미: 순결, 새로운 시작, 존경
파란색 물망초: 나를 잊지 말아요

그렇군요. 흰색 카네이션을 일부러 넣어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미연에 복선 장치로 활용한 거군요. 무척 멋진 연출이네요. 원작 만화책은 흑백원고로 연재됐을 테니, 이런 연출이 가능했을지 궁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만일 아니메만의 스토리텔링 기법이라면 감독을 무척 칭찬해줘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어린 아이가 손을 뻗어 가까이 하려 했던 싱싱한 '꽃의 생명력'과 방금 숨을 거둔 '할아버지의 죽음'을 대조해서 주인공의 쓸쓸한 마음을 더욱 부각시켜줍니다. 훌륭한 상징의 쓰임입니다.

또 상징 이야기를 논한다면 '빛'의 쓰임을 짚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빛을 긍정적인 것으로, 어둠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곤 하지요? 어두운 방에 최소한의 촛불 하나만을 켜놓고 위험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결국 일이 터지고 나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촛불을 꺼트린다. 공포영화의 클리셰입니다. 어쩐지 위험함을 직감한 주인공의 친구가 하려던 행동은 불을 키는 거였어요. 빛을 불러와 일상의 안온함을 되찾으려던 거겠지요.

친구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사망신고서를 쓰는 주인공. 그런 그에게 접선해오는 후시구로. 아직 일상의 세계에 속해있는 주인공은 빛이 환한 조명속에서 서있고, 곧이어 저주라는 비일상의 세계를 소개해줄 후시구로는 어두운 복도에 서있습니다. 마침 시계는 11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네요. 밤 11시부터 새벽 1시는 자시(子時)라고 해서 천문이 열리고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이라고 했다지요.

처음 보는 사람이 저주니 뭐니 떠들어대는 걸 바로 믿을리가 없잖아요. 반신반의하는 주인공의 몸은 점차 환한 빛이 비추는 접수대 쪽으로 점점 가까이, 저주를 논하는 후시구로에게서 점점 멀어집니다.

친구들이 있는 학교 앞에 와서야 저주를 직접 체감하게 된 주인공. 비일상의 세계에 한 발을 담구게 되었습니다. 후시구로를 따라 친구들을 구하러 갈지 말지 갈림길에 서있는 그의 옆에 가로등 불빛이 "도망쳐라, 기다려라"라고 일상적이고 이성적인 말을 속삭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죽음을 돌이켜보는 주인공의 머리 위로 달빛이 구름에 가려집니다.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비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는 주인공.

주인공의 개입으로 잠시 유보된 위기. 극의 진행에 필요한 대화들을 나눌 때에도 소화전의 빛이 반짝입니다. 다만 그 빛은 따뜻하고 평화롭다기보다 '위험'을 알리는 듯해요. 잠깐의 소강 상태가 끝나고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을 때 카메라는 빛이 없는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화면속엔 빛이 없어지고, 저주가 찾아옵니다. 저주는 학교를 부수어 소화전마저 망가트립니다. 어둠은 저주의 공간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몸을 차지한 이 귀신은 얼마나 강력합니까. 어둠에 속해 있으면서도 빛을 당당하게 탐하고, 빛이 가득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잡아먹을 정도니까요. 앞서 빛과 어둠을 이용해 저주의 양상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달빛에 드러나는 비인간적인 면모가 이다지도 충격적이고 공포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아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제가 1화를 연달아 2번 시청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마음을 먹게 만들었던,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구조를 저는 정말 칭찬하고 싶습니다. 무어라 정리를 해야 하는 순간이 왔는데, 어떻게 글을 마무리 해볼까요... 


그래서 1편만의 Hook이 있었냐고요? 그럼요, 물론이죠. 여기까지 글을 쓰면서 2화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요. 다음 편 무조건 보고 싶습니다. 주인공이 어째서 이런 강력한 면모를 보인 것인지 궁금해요. 주인공이 새로 찾아온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궁금해요. 오프닝 주제가 영상에 나온 여캐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해요! (여캐사랑맨~)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주인공이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할지가 궁금해요. 이중자아 모티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지 궁금해요. 아아, 정말 재밌는 만화를 만났어요. 기뻐요.


어때요, 함께 달려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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