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차_폰페라다에서의 휴식과 도시 탐방
공립 알베르게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룻밤이다.
오늘은 성 토요일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며 비아프랑카로 길을 떠나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앞서 이탈리아 순례자 프레도에게서 부활 성야미사를 레온으로 돌아가서 드리자는 제안을 받았었다.
버스로 레온으로 이동한 후 내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자는 것이다.
지금 머물고 있는 폰페라다도 만족스러운 도시였다.
여기에서 부활절을 맞아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장 회장님 상의한 결과, 우리는 폰페라다에서 부활을 맞기로 결정했다.
이제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하루 더 지낼 숙소를 예약하고, 필리핀 순례자 벨과 만날시간을 정하고, 저녁에는 부활성야미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와 템플기사단성 근처의 카페에서 브런치를 시켰다.
장 회장님과 한가로이 수다를 떨고 있었더니, 우리를 발견했는지 최영화씨가 안으로 들어왔다.
최영화씨는 경상도 아가씨다.
그녀의 영어회화는 깊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다.
‘저 정도 실력이니 혼자서 이렇게 오지. 대단해.’
그녀는 어제 폰페라다에 도착하자마자, 물집치료를 위해 보건소로 갔다고 한다.
의사로부터 물집치료를 위해 당분간 걷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단다.
그래서 오늘은 폰페라다에서 그냥 한가롭게 지내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도 오늘 하루 더 쉬어 갈 것이라고 얘기하니,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스텔을 우리에게 소개시켜줬다.
그 호스텔은 연박 예약이 가능한 곳이었다.
숙소는 2층 침대였지만, 예약한 순례자가 많지 않아 침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숙소는 전체적으로 무척 깨끗했으며,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상태를 보여줬다.
나는 이 숙소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회장님은 1층 침대만 있는 따로 떨어져 공간을 차지했다.
최영화씨는 레온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아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2주간의 휴가기간 동안만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휴가를 내자마자 무작정 이 곳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다.
순례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 길이 천주교와 관련된 것은 알지만, 산티아고가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하나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냥 길이 예쁘고 경치가 좋다는 얘기에 끌렸다고 한다.
그녀의 말을 들을 수록 무척 당황스러웠다.
‘용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모르고 오면 어떠랴!
이곳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얻고 가라고 얘기하니, 순례길에 대해 모르고 온 것이 지금은 후회된다는 표현을 한다.
최영화씨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성심껏 얘기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첫 물음이 귀를 울린다.
“순례자가 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이 말은 순례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가능한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앞 뒤 전 후’ 모두 생략된 채 결과를 얘기해 달라는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엇인지 알아야되는 것 아니에요?”
“지금 저에게 시간이 없어서요. 전부를 알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요.”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지금부터 순례자처럼 걸어보고 싶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가톨릭평화방송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토크 프로그램 유튜브 링크를 보냈줬다.
그 프로그램의 제목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거룩한 바보의 길’이다.
총 분량은 2시간 가량되는 프로그램으로, 이것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한가지 만은 꼭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거룩한 바보의 길인 이유를.
‘부엔까미노’라는 순례자간의 축복인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순례길을 상징하는 조개껍질 빗살무늬가 모여드는 하나의 정점이 무엇인지를.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그 이유, 그 목적, 그 정점을 찾기 위해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라 말했다.
나의 순례길의 의미는 내 옆에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같다고 나의 생각을 전했다.
그러면서 폰세바돈에 올라오기 전 마을 라바날 델 카미노에 있는 몬테이라고 베네틱토 수도공동체의 3대 핵심 가치를 소개했다.
‘순례’와 ‘침묵’과 ‘환대’.
순례는 걷는 것이요
침묵은 나를 성찰하는 것이요
환대는 내 옆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멋진 말이다.’
지금 혼자 잘난 맛에 취하는 느낌이다.
입이 열리니 강의가 시작됐다.
‘가장 미천한 자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복음 25장 40절에 나오는 그 문구는 순례자는 물론 순례자를 맞이하는 모든 이에게 통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핵심 문구라고 말했다.
그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고, 그가 필요한 때에 내가 함께 해주는 ‘또 하나의 그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영화씨가 내 말에 감동을 받았나보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끄덕끄덕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선물을 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선물은 내가 가지고 있던 ‘코덱스 칼릭스티누스’ 책이다.
나는 이미 그 책을 정독한 상태다.
이제 그 책은 내 배낭의 무게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 책을 없애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지금 이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생긴 느낌이다.
최영화씨에게 코덱스 칼릭스티누스를 넘겨줬다.
“이 책 읽어보면 순례길 걷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에요. 그리고 나에게 돌려주지 마세요. 이건 내 손을 떠나는 순간 내 책이 아니에요. 알아서 처분하세요. 다른 사람을 주든 이제부터는 이 책의 주인입니다.”
뿌듯한 마음을 느끼며, 벨을 만나기 위해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필리핀 순례자 벨을 만나기 위해 폰페라다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폰페라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가 늘어나면서 생겨난 마을이란다.
본래 마을 이름은 라틴어인 폰스 페라타(Pons Ferrat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폰스 페라타는 철로 된 다리라는 뜻이다.
1082년 오스문도(Osmundo) 주교가 마을을 가로지르던 실 강(Rio Sil) 위에 다리를 세운 데서 이름이 시작됐다고 한다.
이 도시에서 가장 볼만한 장소는 템플기사단의 성(Castillo de los Templrarios)이다.
이 성은 실 강 언덕 위에 있다.
성 안으로 입구의 거대함은 템플기사단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순례자 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5유로에 입장 할 수 있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템플기사단을 소개하는 글이 있었다.
템플기사단은 익히 알고 있는 기사단이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기사단이기도 하다.
템플기사단을 생각하면 ‘십자군전쟁’이 연상된다.
성지탈환이라는 거룩한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십자군이다.
‘성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하는 걸까?
십자군전쟁에서 템플기사단의 활약은 어마어마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당위성을 놓고, 그들이 행했던 잔혹한 살인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제1차 십자군전쟁을 승리한 후 권력쟁탈과 실크로드 상인의 목숨을 담보로 부를 축적해 왔던 행위는 또 어떤가?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던 기사단임은 존중해야 하겠지만, 나는 전쟁 자체를 성전처럼 여겼던 아이러니를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템플기사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럽으로 가져온 수많은 성물들도 문제가 많다.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을 떠나, 성물이라며 비싼 값을 부렀던 ‘거룩함의 비용’도 생각해 볼 이야기다.
템플기사단의 3대 핵심 사명은 청빈, 정결, 순명이다.
베네딕토회나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 대부분의 수도회도 3대 사명으로 지키는 가치다.
‘정말 그들이 그렇게 살았을까?’
가난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프란치스코수도회에 대한 비아냥소리가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필리핀 순례자 벨과는 성벽 내부에서 만났다.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30여분 늦게 도착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방에서 쉬다 늦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벨이 자신의 아랫배쪽에 생긴 종기를 보여주며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늦은 자신이 미안했는지 자신의 힘든 상황을 표현하는 모습이 귀엽다.
67세의 나이에 하는 행동이 꼭 어린아이 같다.
‘나이가 들수록 행동은 아이가 되는 것일까!’
템플기사단의 성은 성벽을 돌아 내부 광장으로 들어가는 동선이 이어진다.
이곳에는 12개의 탑이 존재하는 데 이것은 열두제자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얘기로는 12개의 탑은 12궁도 별자리를 상징한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인 추론으로는 템플기사단이 그리스도교를 지키기 위한 방패역할이었던 것과, 교황청 직속 기사단으로 배속받았던 과거의 행적을 비춰볼 때, 12개의 탑은 열두제자를 상징한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 것으로 본다.
이 성은 보존이 정말 잘 돼 있다.
여기에서 지금 당장 중세시대 영화를 촬영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오늘은 부활 성야다.
벨과 템플기사단의 성을 둘러본 후 시계탑이 있는 엔시나 광장(Plaza de la Encina)으로 가서 닭고기요리를 함께 먹었다. 한참 있으니 헝가리 순례자 그레이타가 나타났다.
그레이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오늘 부활성야미사를 드릴 성당을 찾고 있다고 한다.
장 회장님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더니, 어제 잠시 들렸던 성당에서 8시 미사가 있다고 답이 왔다.
나와 그레이타는 8시 조금 넘어 그 성당으로 들어갔다.
장 회장님과 최영화씨가 미사를 보고 있었다. 옆에 자리에 앉아 4명이 함께 부활미사를 드렸다.
미사가 끝나고 나와 순례자들에게 축복인사를 했다.
“Congratulation, easter-of Jesus”-예수 부활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그레이타가 바른 영어로 화답해 준다.
“Happy easter”- 행복한 부활 되세요.
‘이렇게 짧다니.’
영어는 참 쉬운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