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차_철의 십자가가 있는 폰세바돈
오늘은 폰세바돈까지 27km를 간다.
폰세바돈은 철의십자가(Cruz del Ferro)가 있는 장소로 산티아고순례길의 핵심 중 하나다.
아침부터 조급함이 크게 밀려온다.
철의 십자가에 도착할 때까지 죄묵상을 완료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여전히 40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상태로, 사실상 시간적으로는 죄묵상을 완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분기별로 구분해 묵상하지 않고, 1년 단위로 진행할 생각이다.
멀지 않은 기간의 과거시간이다보니, 내가 지은 죄가 더 뚜렷하게 기억난다.
죄의 근원을 찾아야 할 사건, 사건들이 계속 생각나니 1년기간이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 조바심이 한가득이다.
오늘 길은 평지를 걷다 언덕을 치고 올라가야 한다.
오후가 되면 이라고산(Monte Irago) 중턱에 있는 폰세바돈 마을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나에게는 힘든 이 산을 올라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산 입구인 라바날 델 카미노(Rabnal del Camino) 마을에 있는 라면 맛집이다.
한국인들에게는 유명한 맛집이다. 다만, 본래의 순례길을 조금 길을 벗어나야 한다.
‘갈 길이 멀더라도 라면은 먹고 가야지!’
장 회장님을 앞서 보내고 나는 라면집으로 향했다.
라면 맛집으로 소문난 이곳은 알베르게와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알베르게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필라르(Albergue Nuestra Senora del Pilar)다.
‘필라르 우리들의 어머니 숙소’라고 해석해야 할까?
여기에서 배부르게 맘껏 먹었다.
그리고 테이블 의자에 기대 맥주도 시켜 멍때리기를 시전했다.
오늘 이곳 손님은 순례자로서는 나 혼자뿐이다.
카페 전체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
한참 지나니 가족인 듯한 동네분들이 들어오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손자, 손녀. 내 눈에는 3대가 함께 온 듯 보였다.
그분들은 내가 밖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랬던 것인지는 카페 내부로 들어가셨다.
이곳은 또 몬테 이라고(Monte Irago) 베네딕토 수도공동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공동체는 ‘순례’ ‘침묵’ ‘환대’를 3대 의무로 두고 있다.
수도공동체 정문에 써 있는 문구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말은 마태오복음 20장 25절의 내용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내용을 주제로 한 성가를 익히 알고 있다. 자주 그리고 많이 부르는 성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때 주님께 음식을 드렸고
목마른 주님께 마실 것 언-제 드렸나.
.......
진실히 네게 이르노니 미소한 형제 중에-
하나에게 해 준 것 모두가 내-게 한 것 이니라. 내게 한 것이니라.
수도원 문구를 읽으니 배부르게 먹은 내 자신이 미안해진다.
혹시 순례길에 오르는 분들이라면 이 수도공동체를 방문해 보길 청해본다.
나는 수도공동체에 들어갈까 하다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바로 이동했다.
이제부터는 무조건 오르막이다. 길을 오르는 순례자들도 많아졌다.
‘정말 사람이 많아졌구나!’
30분마다 한반씩 쉬면서 산을 올랐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에 응원을 하며 여러 순례자들이 앞서 나갔다.
어느덧 목적지인 폰세바돈이다.
앞서 가셨던 장 회장님은 포세바돈 마을 입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식사는 하셨는지 몰라.’
회장님과 인사를 한 후 부엔까미노 앱에 평점이 좋은 호스텔(Alberue Monte Irago)을 발견했다.
우리가 들어간 호스텔은 포세바돈 마을 입구에 있는 숙소다.
폰세바돈 마을은 너무 작아서 입구라고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이라고몬테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었는데, 순례자들이 몰려 오후 3시가 되자 만실이다.
동네도 작을 뿐 아니라, 우리가 머무는 숙소는 수용 인원이 20여명이 최대일 것 같다.
여장을 풀고 순례자의 일상을 시작했다.(샤워와 빨래)
이제 마지막 죄묵상을 끝내야 한다.
내가 기한으로 잡은 죄묵상은 오늘까지다.
그 이유는 내일 새벽 철의십자가에 올라 내가 하느님을 향한 삶을 살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숙소 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그동안의 일을 정리했다.
잠깐 휴식을 취하려 담배를 피기 위해 숙소 뒤 들판을 걸었다.
그런데, 이 석상이 왜 여기에 있을까?
그것은 조그마한 불상이었다.
“부처님! 안녕하세요.”
그 불상을 보자마자 ‘아 그렇구나!’ 하는 그 무엇이 마음을 스쳐갔다.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임제스님의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뜻이다.
나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셔버리라는 의미다.
부처라는 관념, 조사나 아라한이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루는 길이 살불살조인 것이다.
권위든 경험이든 관념이든 나를 속박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과감하게 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된 진리의 자리가 된다.
깨달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조바심을 갖는 것 조차도 나를 얽매고 있는 하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조바심 갖지 말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곳 알베르게는 스페인사람이 아닌 독일분이 운영하는 숙소다.
이유를 물어보니 스페인 남성과 결혼해, 여기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음악가로 생활해 왔다고 한다.
숙소 건너편 쉼터에서 ‘작은 공연’이 열리고 있다.
알베르게 주인 부부가 순례자들을 위해 연주와 노래를 하고 있다.
많은 순례자들이 주변에 모여 그들의 공연을 감상중이다.
저녁은 순례자메뉴를 먹었다.
내 옆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연인이 앉았다.
그런데, 연인가운데 남자가 한국에 관심이 많은지 이것저것 물어온다.
발음을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다시 말해달라고 얘기했더니, 여성이 그 남자의 질문을 다시 말해준다.
그 여성의 발음은 잘 들렸다. 매번 그 남자가 물으면 나는 그 여자에게 무슨말인지 알려달라 쳐다보게 된다.
영어로 대화하면서 ‘통역’이 필요했던 신기한 경험이다.
그 남자에게 많이 미안했다.
내일 철의십자가에 오른다는 기쁨과 설레임에 잠이 오질 않는다.
철의십자가는 내가 걷는 순례길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고, 가장 의미있는 장소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를 잠에 들었을 때, 홀로 숙소 뒤편 들판에 나와 걸었다.
달도 밝고, 저 멀리 아스트로가 도시의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나는 넓적한 커다란 돌맹이 하나를 집어 내일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적기 시작했다.
돌맹이 가장자리를 둘러 한명, 한명의 이름을 적어나갔다.
그리고 돌맹이 한 가운데 크게 적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은 이것이었어.’
숙소로 들어와 돌맹이를 배낭에 집어넣었다.
오늘도 폰세바돈의 달은 서서히 산을 걸어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철의십자가에 대한 주의사항을 적어본다.
[카미노의 상징적 장소다. 순례자가 자신의 죄만큼 큰 돌을 가져오는 곳이다. 주의해라. 여기에는 돌만 남겨놔야 한다.
리본, 기념품, 엽서 및 기타 다른 물건은 쓰레기로 취급돼 수거된다. 매일 수백명의 순례자가 지나는 곳이며, 이러한 환경 때문에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