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이밍.
운칠기삼.
한 사람의 인생에 노력이 아닌 '운'이 꽤나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건, 우리 모두 주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때로는 '운때'를 잘 타고난 것이 역사의 큰 줄기를 바꾸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바로 성종과 월산대군, 두 형제의 이야기다.
두 형제가 타고난 '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조금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성종과 월산대군은 의경세자와 인수대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의경세자는 조선의 7대 왕 세조의 맏아들이고, 인수대비는 한확의 막내딸이다. 한확? 인수대비? 의경세자? 어려운 이름들이 헷갈릴 때는 가계도를 참고하자.
인수대비의 아버지이자, 성종과 월산대군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한확은,
조금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누이들 팔아 떵떵거리고 산 인간'이다.
아, '누이와 딸들'이라고 수정해야겠다.
한확의 두 여동생은 세종 치세에 명나라에 공녀로 팔려갔다.
미모가 뛰어났는지, 아니면 운이 좋았는지, 둘 모두 조선 여인으로서는 꽤나 높은 자리에 오른다. 조금 먼저 명나라에 간 언니는 영락제의 후궁이 되어 '여비'라는 작호를 받았고, 그보다 늦게 간 동생은 - 이름이 한계란이라고 한다 -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덕분에 조선에 있던 한확은, 대명외교의 책임자 역할을 도맡았다.
누이를 중국에 보내 위세를 얻은 후, 이번에는 딸들을 왕실로 시집보냈다.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에게, 그리고 막내딸은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맏아들 도원군(훗날 의경세자)에게 보냈다. 1450년의 일이다.
1450년은 문종 즉위년이다. 즉, 세종이라는 성군의 시대가 저물고, 빵빵하지만 불안정한 후계 구도와 함께 다양한 위험들이 부상하던 시점이다. 갓 왕위에 오른 30대의 임금은 등창 - 등에 종기가 나는 병이다 - 을 앓고 있었고, 세자는 10살에 불과했다. 유사시에 세자의 뒤를 보아 줄 중궁전과 대비전이 모두 비어있었고, 왕궁에는 굵직한 왕자들이 그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양대군은 명나라 후궁을 누이로 둔 한확을 사돈으로 맞이했다. 이게 과연 순전히 우연일까? 도원군과 한확의 막내딸이 혼인하고 2년 후에,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계유정난이 일어났고, 한확은 정난공신 1등의 봉작을 받았다. 한확의 둘째사위인 계양군 또한 세조의 편에 섰다. 세조와 한확, 두 아버지들에게 자식들의 혼인으로 말미암아 연대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확은, 막내딸에게 끝까지 버팀목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세조가 즉위한 이후, 1456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457년, 의경세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졌다.
이후 왕실과 조정에서는 세자를 누구로 책봉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원칙대로 하자면, 왕위는 적장자가 계승해야 하므로,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당시에는 원손이었다)이 잇는 게 옳았다. 하지만 역사는 원칙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당시 4세였던 월산대군이 나이가 너무 어려 종사를 돌보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따지면 해양대군은 당시 9세였다. 4살이나 9살이나... 더욱이 세조는 건강했고, 그 후로 10년을 더 살았다.) 결국 갓 스무살의 인수대비는 수빈 - '빈'이라는 작호 앞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희빈, 숙빈 처럼)은 보통 후궁들이 받는 정 1품 작호에만 국한되지만, 조선 초기에는 무품 세자빈에게도 이러한 호칭을 사용했다. '수빈'은 인수대비가 세자빈 시절 받은 작호다. - 이라는 애매한 칭호만 가진 채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사저로 물러앉아야 했다.
나는 이게 월산대군의 첫번째 '불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해양대군의 세자 책봉을 주도한 건 세조비 정희왕후였다.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어머니로서 손자보다는 아들이 세자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정희왕후가 사용했던 명분, '원손이 나이가 어리다'는 전례로 고스란히 남아 후대에도 똑같이 사용되었다. 소현세자 사후, 10살의 원손이 있음에도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 그것이다.
만약 한확이 살아있었다면, 그래서 여전히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힘을 쓸 수 있었다면 예종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확과 인수대비가 힘을 합쳐 어떻게든 원손의 세손 책봉을 관철시켰을 것이다.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외할아버지가, 하필 아버지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뜬 것, 그것이 월산대군의 첫번째 불운이다.
두 번째 불운은 월산대군의 혼인과 관련된 것이다.
월산대군은 12세가 되던 1466년, 병조참판 박중선의 딸과 혼인한다.
뒷날 연산군이 겁탈했다고 전해지는, 그 박씨다.
인수대비는 월산대군을 한명회의 딸과 혼인시키고 싶어했다. 한명회는 자타공인 최고의 책사였고,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영의정 자리에까지 오른 한명회는 줄곧 국구를 꿈꿨다. 딸을 왕실에 시집보내 왕의 장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셋째 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냈다. 예종의 첫번째 정비인 장순왕후다. 그러나 불행히도, 장순왕후는 아이를 낳다 사망했다.
한명회의 이 욕망이 인수대비의 상황과 들어맞았다. 당시는 세조와 예종 모두 건강할 때라, 인수대비의 아들들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수빈'이라는 칭호에 묶인 인수대비에게, 유일한 희망은 무언가 '기적'이 일어나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가 왕이 되는 것이었다. 기화가 왔을 때 휘어잡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 두어야 했고, 두 아들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장남인 월산대군이었다.
여기서 월산대군의 두 번째 불운이 발생한다. 월산대군이 혼인할 당시, 한명회에게는 남은 딸이 막내딸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막내딸이 너무 어렸다는 것이다. 훗날 공혜왕후가 되는 그 막내딸은, 월산대군보다 세 살이 어린 성종(당시 자을산군)보다도 한 살이 더 어렸다. 아무리 조혼이 성행하던 시대라고 해도, 여덟살 난 여자아이를 시집보낼 수는 없었다.
월산대군이 놓친 운은 동생인 성종에게로 돌아갔다. 성종과 한명회의 막내딸은 한 살 차이였다. 혼인시키기 딱 좋은 나이 차였다. 1468년, 자을산군(훗날 성종)과 한명회의 막내딸(훗날 공혜왕후)이 혼인했다.(여덟살에 혼인하는 거나 10살에 혼인하는 거나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그냥 넘어가자)
인수대비가 기다리던 '기적'은 기어코 벌어졌다.
1469년 11월 29일(음력), 예종이 즉위 10개월 만에 급사한 것이다.
원자(훗날 제안대군)가 있었으나, 너무 어렸고, - 이번엔 진짜 어렸다. 네살짜리를 왕을 시킬 수는 없지 않나 - 사돈의 든든한 뒷배를 업은 인수대비는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월산대군이 맞이한 두 번의 불운은 모두, 그 자신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죽음도, 한명회 딸의 나이도. 그러나 그 두 번의 불운 때문에, 그는 평생 동생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숨죽여야 했다. 임금보다 세 살 많은 임금의 친형이란, 언제든 누구든 반정을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덕에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어준 집에 살면서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 월산대군의 시조는 수능에도 종종 출제될 정도로,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가 평생을 살면서 지킨 집은, 120년 가량이 지난 임진왜란 때, 임시 행궁으로 쓰이게 된 것을 계기로 궁궐이 된다. 그리고 그 궁궐은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제국을 선포한 곳이고, 5대 궁 중 유일하게 정전의 문 창살에 황색을 쓴 곳이다.
이런 걸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것 같다.
왕이 되지 못해 숨죽여야 했던 사람의 집이, 결국 황제의 정궁이 된 이 아이러니.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
역시, 인생은 타이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