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좋아했어요. 완전완전.
(지극히 나만의 기준에 따른) "2020 올해의 드라마" 두번째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되겠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보다 열흘 정도 늦게 시작하고 닷새 늦게 종영했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중간에 두 번 정도 결방한 탓인 것 같다)
장르적 측면에서, 로맨스나 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올해의 드라마 2편이 모두 멜로다. 다행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만큼 처절하고 비참하지는 않다. 매 순간순간이 안타까운 탄식의 연속이었던 예지-환-진과는 달리, 준영(김민재 분)과 송아(박은빈 분)의 로맨스는 때로는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송아와 준영이 순탄한 인생을 살았는가 하면 또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서령울대학교 음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음악도의 이야기는 어김없이 나를 TV 앞으로 끌어다 앉혔다.
송아는 스물아홉 늦깎이 음대생이다. 스무살에 서령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나, '취미'로 시작한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바이올린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4수 끝에 서령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바이올린전공 17학번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인생은 녹록치 않은 법. 큰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으나 훨씬 더 높은 산이 나타났다. 신동이며 영재, 예고 출신들이 난다 긴다 하는 서령대 음대에서 '나이 많은 꼴찌'로 4년을 보냈다.
4학년 여름에는 경후그룹 산하의 문화재단에서 인턴 일을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준영을 만났다. 이런 류의 드라마들이 으레 그렇듯, 준영은 송아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이미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항간에서 늘 떠드는 천재 피아니스트, 그게 준영이었다. 이미 쇼팽 콩쿠르 입상이라는 쾌거까지 이뤄낸 상태였다.
하지만 준영 역시, 완벽하지 못했다. 제일 큰 약점은 가정환경이었다. 준영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보증을 서 빚을 졌다. 준영의 화려한 연주와 트로피와 상금 뒤에는 생활력은 없으면서 한 탕만 바라는 아버지가 있었다. 금전적인 문제로 피아노를 그만둘 뻔 했던 준영을 후원해준 것이 경후문화재단이었다. 준영에게 경후는 스승이었고, 은인이었으며, 앞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분신이기도 했다.
그렇게 준영은 예중-예고를 졸업하고 서령대 음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긴 시간동안 함께해준 친구들도 있었다. 이름 초성처럼 늘 밝고 긍정적인 한현호(김성철 분)과, 경후그룹 외손녀 이정경(박지현 분). 정경은 어린 나이에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그 보상금은, 고스란히 준영에게로 돌아갔다. 준영의 재능이 너무도 아까웠던 정경의 외할머니가, 그 보상금으로 준영에게 장학금을 준 것이었다. 그래서 정경에 대한 준영의 마음은 항상 죄책감 또는 미안함이었으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정경이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준영은 곧,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마음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정경의 외할머니와,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리고 오랜 시간 정경을 마음에 품고 있는 현호를 생각하면 그것이 옳았다.
정경은 신동이었다. 줄리어드에서도 전설로 불리는 교수의 눈에 들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곧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중-예고 테크를 거쳐 서령대를 졸업할 때까지도 쭉 1등이었으나, 본인도 안다. 어린시절에 비하면, 평범해졌다는 걸.
정경은 항상 준영의 재능을 아까워했다. 상금을 타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쉬지 않고 국내 콩쿠르에 나가는 준영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준영을 쇼팽 콩쿠르로 이끈 것도 정경이었다. 그러나 막상 쇼팽에서 수상하고 전세계로 독주회를 다니는 준영을 보자, 유치한 질투심이 일었다. 준영을 흔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뉴욕에서 열린 준영의 독주회에 찾아가, 반갑게 웃으며 다가오는 준영의 턱을 잡고 입을 맞춰 버렸다. 준영의 흔들리는 동공에서 시시한 승리감을 느끼기도 잠시, 곧 정경의 마음에 도리어 파장이 일었다.
예지와 환 사이에 놓인 가장 큰 장애물이 가족이라는 사회적 속박이었다면, 준영과 송아의 걸림돌은 보다 외부적이고 공적인 것이었다. 송아가 경후문화재단에서 인턴을 하는 동안 둘은 가까워졌지만, 준영은 우선 정경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야 했고, 그것이 끝났을 때에는 현호와의 10년 연애를 단번에 끝내버리고 순식간에 다가온 정경을 밀어내야 했다. 준영은 죄책감과 고마움과 애정 같은 것들이 뒤섞인 탓에 정경을 단호하게 잘라내지 못한다.
반면 송아는, 처음부터 "급"을 걱정해야 했다. 다른 일을 했다면 국내 최고 대학의 최고 학과 졸업생으로 살았을 송아는, 바이올린을 선택하고부터는 내내 "늦깎이"이자 "꼴찌"였다. "채송아입니다" 하는 자기소개가 "죄송합니다"로 오해를 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박준영이, 그 언니랑 만난대. 누구? 그 왜 있잖아, 기악과에 나이많은 언니. 하는 수군거림은 줄기차게 송아를 따라다녔다. 준영이 정경의 이기적인 돌진에 지쳐갈 때, 송아는 매일매일 자신의 "급"을 확인하면서 무너져 갔다.
다행히, 준영과 송아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송아는 연주자의 길 대신 경후문화재단에 정식으로 입사해서 공연기획자가 된다. 그리고 준영은, 여전히 천재 피아니스트로 훨훨 날아다닌다. 호텔에서 준영의 옷을 챙겨주는 송아의 모습과, 벽면에 붙은 포스터에 깨알같이 '기획 채송아'를 적어넣는 준영의 모습은 흐뭇한 웃음을 자아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사건들이 마구 휘몰아치는 극적인 드라마는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잔잔하게, 그러나 송아와 준영을 마구 흔들며 흘러간다. 개인적으로는 예지-진-환의 이야기가 어른들의 사랑이야기였다면, 송아와 준영은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아직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있는 청춘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급" 차이에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는 송아를 보면서 희망을 느꼈다.
기획자로 사는 송아는 행복할까? 가끔 생각한다.
송아의 29년 인생 전부를 함께한 건 아니지만, 러닝타임으로는 1120분 가량, 극 중 시간으로는 반 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본 송아는 바이올린을 정말 사랑했다. 잘하지 못해도, 4년 내내 꼴찌만 해도, 바이올린을 좋아했고, 바이올린 켜는 순간을 행복해했다. 그런 송아가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졸업과 함께 연주자의 길을 내려놓은 것이 조금은 슬프다.
하지만, 그래도 송아는 행복할 것 같다.
꿈꿔왔던 것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넓은 무대에 혼자 올라 단 한 번의 연주로 좌중을 압도하는 그런 연주자는 되지 못했지만,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 동안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봤기 때문에 후회는 없지 않을까.
비록 무대 뒤에서, 무대를 만들고 공연을 기획하고, 월드 클래스 피아니스트 박준영을 서포트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송아는 4년, 아니 그 이상의 기간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열정과 재능을 다 쏟아냈다. 설사 순간순간 연주자에 대한 아쉬움이 생기더라도, 그건 그저 아쉬움으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매 순간 모든 일에 100% 만족하면서 산다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을 테니까.
p.s. 연말 시상식에서 송아-준영 커플이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다. 준영 본체가 트로이메라이로 축하공연을 한 직후라 더 기쁘고 짜릿했다. (조금 늦었지만) #잊지못할_2020을_선물해준_팀브람스_고마워
p.s.2. 드라마를 그렇게 봤으면서도 드라마 갤러리에는 브람스를 보면서 처음 들어가봤는데, 송아 본체가 베스트 커플상 수상소감하면서 "단원들" 언급해줘서 좋았다. 진짜 귀여워서 어떡하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