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경복궁보다 13년 가량 늦은 1405년에 지어졌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즉위한 태종은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손수 척살한 세기의 정적, 정도전이 전각 하나하나의 이름에까지 정성을 기울인 궁궐이었기 때문이다. 개성의 수창궁에 머무르려다가 새 나라의 왕이 지나간 왕조의 수도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명분 아래, 울며 겨자먹기로 한양에 돌아와서 지은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서울 시내의 5개(혹은 4개)의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경복궁을 비롯한 다른 궁궐과 비교했을 때, 지형의 활용이나 전각의 배치 등에서 자연과의 조화가 뛰어나다. 그리고 둘째, 역대 가장 많은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궐로, 역사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한 번씩 가 보기만 해도 첫 번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근정전과 사정전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들이 남북축 위에 정연하게 정렬되어 있는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의 전각 배치는 일견 자유분방하다. 주변의 산세를 허물지 않고 주어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궁궐을 들어앉힌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이유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역대 가장 많은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궐. 우리는 언제나 최고에 감탄하지만, 1등이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안 해도 되는 1등, 안 했다면 더 좋았을 1등, 그래서 어딘지 씁쓸한 1등도 있는 법이다. 창덕궁의 1등도 그러하다.
창덕궁은 최후의 궁궐이다.
이왕으로 전락한 순종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궁궐이며, 심지어는 해방 이후 어렵게 한국에 돌아온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생의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처음 지어진 1405년부터 순종이 승하한 1926년까지, 혹은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까지 합치면 무려 1989년까지, 가장 많은 왕실 식구들이 가장 오래 머문 궁궐임에는 이견이 없다.
덕분에 창덕궁은 처음부터 끝까지 '궁궐'이었다. 한때 창경원으로 전락했던 창경궁이나, 사실상 5대 궁의 지위를 잃어버린 경희궁과는 다르다. 일제강점기 내내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 혹은 이왕과 이왕비가 - 기거했기 때문에, 일제도 함부로 창덕궁을 훼손하지 못했다. 창덕궁은 내내 창덕궁이었다.
그러나 '변형'은 있었다. 순종이든 순정효황후든, 아니면 이방자 여사든 그들 또한 모두 근대인이었다. 근대의 문물을 기꺼이 수용했으며, 때로는 그 열매를 힘껏 누리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타락죽 대신 커피를 마셨고, 비단금침 대신 침대에서 잠을 잤으며, 멀리 이동할 때에는 가마 대신 자동차를 탔다. 안에 사는 사람의 생활습관이 바뀌니, 그들이 사는 집도 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에는 아직까지도 그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 이야기다. 경복궁에서 훼손과 복원 노력을 보았다면, 창덕궁에서는 근대화에 따른 건축물의 '변형'을 주로 살펴볼 예정이다.
지나간 시대의 최후의 생존자들이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맞이하고 또 적응했는지, 또 그들과 함께 최후의 궁궐은 어떻게 변형되고 자리잡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