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낼 용기. 송지영 작가 북토크.
“널 보낼 용기”를 쓴 송지영 작가님 북토크에 다녀왔다. 이야기하는 내내 작가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슬픔을 말하지 않았다. 아픔에도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한 사람의 용기와 희망을 전했다. 글로 써내며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었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브런치 글 첫 화 “꿈이라고 해줘요.”
누구나 꿈이라고 말해달라고 애원하고픈 밤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날, 누군가를 마음에서 지워버린 날 아니면 지워진 날. 어린 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마치 인생책에 쓰여 있던 것처럼 어떤 일을 계기로 관계가 멀어지기도 한다. 내 인생책에도 그런 시나리오 하나가 쓰여 있었다. 이유가 없는 일에 이유를 찾으려 자신을 아프게 했다는 작가의 말에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다. “왜 나는 00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왜 나는 00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을까? 작가님이 ”왜 그때 내가 더 세심하게 보살피지 못했을까. 더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을까. “ 엄마로서 수없이 자책하고 하얀 밤을 새웠을 그 시간들. 그 문장을 들으며 나는 오래된 내 마음의 상처를 떠올렸다.
외로워서 달리기 시작했다. 낯설어졌다. 처음엔 세상이, 그다음은 가족이, 마지막으론 나 자신이. 아무런 준비 없이 마흔여섯에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엄마, 아빠를 옹알이하며 첫걸음을 뗀 아기처럼 비틀거리며 달리기를 시작했다. 외롭고 아플 때마다 가슴에 닿는 시가 하나 있다. 달릴 때마다 달리기가 내게 해주는 말처럼 들렸던 서정윤 시인의 시. “다시 홀로서며 5”
“사랑의 상처를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해선 안된다. 고통은 밤하늘 개울음처럼 자꾸만 서로를 불러내올 뿐. 아픔은 결국 내 속에서 고쳐야 한다. 절망하며 사랑으로 난 문을 닫아도 가슴속 깊은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고통과 치유의 본질을 이처럼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 있을까. 서점 매대에 올라가 있는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내가 안아줄게.” 같은 인스턴트 치유 글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이 싫다. 멋스럽고 예뻐 보이는 희망고문 같은 글이 싫다. 그런 글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다. 고통과 상처는 그런 게 아니다. 캘리그래피 몇 줄에 담아 책갈피에 넣고 다니는 그런 글귀가 아니다. “고통은 밤하늘 개울음처럼 자꾸만 서로를 불러낸다.” 이 대목에서 항상 전율이 온다. 치유하지 못한 고통은 다른 이의 고통을 부르고 상처를 더 아프게 누를 뿐이다.
나는 5년 간 달리며 홀로 서고 있는 인간이다. 상처를 또 다른 상처로 치유해선 안된다. 송지영 작가님의 책은 홀로서기 시의 마지막 구절을 말해주는 듯하다. “절망하며 사랑으로 난 문을 닫아도 가슴속 깊은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누가 말했다. “승우님 글에는 간절함이 있어요. 그 간절함이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요.”라고. 글쎄,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 ‘가슴속 깊은 불씨’라고 해두자.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겠다는 꺼지지 않는 불꽃, “그럼에도 나 여기 있소.”라고 타오르는 존재의 외침.
불사조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구김 없는 흰 도화지 같은 사람이 아닌 물을 쏟고 물감이 흩어져도 그 모든 것이 어울려 세상에 없는 예술작품처럼 빛나는 인간이 그려내는 희망의 불꽃이 좋다. 송지영 작가는 내게 불사조다. 그의 책 “너를 보낼 용기”는 희망의 증거다. 너도 다시 홀로 설 수 있다고 속삭여주는 단 하나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