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끝이다. 연말을 맞아 사람들이 지난 일 년 간의 삶을 돌아볼 때, 연뮤덕인 나는 이번엔 내가 또 대학로에 얼마나 자주 출근도장을 찍었는지 확인한다. 평소에 엑셀로 공연 관람 일정을 정리하는데 그걸 보면서 2021 정산을 해볼까 한다.
월급 루팡은 이렇게 하세요, 연뮤 정산 엑셀 편.
우선 올 한 해 내가 공연을 보러 다닌 횟수는 총 72회다. 작년엔 142회, 그보다 앞선 2019년엔 146회의 관람 기록을 세우며 연뮤에 미친놈적 면모를 보인 데 비하면 상당히 자중한 모양새다. 2017년 하반기 입덕 후 이듬해인 2018년에 75회 관람한 것과 비슷하니 초심을 찾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된 데에는 코로나19 시국 영향이 크다. (다 지났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 다이어리를 사자마자 맨 앞장에 쓴 내 목표는 한 달에 공연 두 번까지만 보기였다)
2021년 처음 본 작품은 연극 <킹스스피치>였다. 콜린 퍼스가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하며 국내에서는 처음 올라온 작품이다. 내가 여태 본 연극열전 작품 중에선 비교적 가볍게 다가온 작품이기도 하다. 극 중 주인공 버티가 말더듬증을 극복하고 영국의 왕으로서 연설을 해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연설 내용이 코로나19 시국과 맞닿아 뭉클했다고들 한다.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내게까지는 와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월에는 정말로 <킹스스피치> 한 편만 봤다.
한 달에 공연 두 번까지만 보기로 마음먹고 하나 더 다짐한 게 있다. 회전은 자중하고 다작하자.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기보다 여러 작품, 특히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작품을 새롭게 경험하는 데 올해 덕질의 가치를 두자고 생각했다.
하여 한 해 동안 본 작품의 수는 35편이다. 작년에 본 작품 수 38편과 비교하면 줄었지만, 총 관람 회수가 146회에서 72회로 줄어든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회전은 자중하고 다작했다'고 할 수 있겠다.
2021년엔 연극 13편, 뮤지컬 21편, 음악극 1편을 봤다. 그중에서 올해 처음 본 공연은 <킹스스피치>를 포함해 <베르나르다 알바> <태일> <명동로망스> <몬테크리스토> <빈센트 리버>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리 앙투아네트> <분장실> <분장실 Ver 2> <카포네 트릴로지> <하데스타운> <빌리 엘리어트> <아가사> <웨딩플레이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칠칠> <스핏파이어 그릴> <내게 빛나는 모든 것> 등 18편이고, 이 중 실제 국내 초연작은 7편이다.
한 작품 당 최대 회전(관람) 회수는 작년에 비해 대폭 줄었다. 작년엔 연극 <데스트랩>과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을 각각 18번씩 봤는데, 올해는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를 온라인 스트리밍 4회 포함, 6번 봤고 그다음으로 뮤지컬 <헤드윅>과 연극 <마우스피스>를 5번씩 봤다.
한 작품을 두 번 이상 보는 이유는 다양했다. 우선 <블랙 메리 포핀스>는 공연의 홍보 문구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넘버를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컸고(이 작품은 배우들의 목소리로 녹음된 OST가 없다. 아주 예전에 프레스콜 음성을 따서 만든 증정용 OST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구할 길이 없다), <헤드윅>과 <마우스피스>는 배우들의 연기에 이입하게 되는 순간이 좋았던 게 크다. 특히 <헤드윅>은 배우 오만석 씨의 회차로만 다섯 번을 기록했다.
이 외에 <데스트랩> <팬텀> <와일드 그레이> <렁스> <분장실 Ver 2> <하데스타운> <카포네 트릴로지> <웨딩플레이어> <경종수정실록> <엘리펀트송> 등을 두 번 이상 봤다. 여러 번 본 작품이라고 모두 다 내 마음에 쏙 들었던 건 아니다. <분장실 Ver 2>와 <카포네 트릴로지>는 작품 자체의 만족도는 상당히 낮았으나, 오직 특정 배우가 특정 연기를 선보이는 특정 장면이 좋아서 두 번 이상을 봤다. 작품 위에 배우를 두고 연뮤덕질을 하진 말자고 다짐하는데 그걸 지키지 못한 경우이다. 특히 <분장실 Ver 2>는 이런 콘셉트와 이런 인물 설정을 갖고서 어떻게 그런 대본을 쓸 수 있었는지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물론 작품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한 날들이 더 많다. 그래서 올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자랑하고 싶은 작품 열 편을 꼽아봤다.
우선 뮤지컬 <팬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품이다. 2017년에 처음 본 이후로 시즌마다 두 번 이상은 꼭 봤는데 올해는 다섯 번을 봤다. 여자 주인공 크리스틴 다에 역의 배우이자 소프라노 임선혜 씨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더는 <팬텀>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다(언제든 선혜 배우의 입장 번복을 기다립니다). <팬텀>은 노래와 춤, 이야기가 함께하는 복합장르로서의 뮤지컬 특성을 매우 잘 활용한 작품이다. <팬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넘버 '비스트로'에서 크리스틴이 선보이는 오페라 음악부터 작품의 큰 에피소드 하나를 온전히 춤으로 표현해주는 발레 장면,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앙상블들의 완벽한 호흡, 그리고 작품 속 팬텀과 크리스틴이 만드는 은은하지만 깊이 있는 멜로까지, 대극장 뮤지컬의 맛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다음은 뮤지컬 <헤드윅> 내 기준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겠는' 작품 1위다. <헤드윅>을 처음 본 건 2019년이었다. 공연 당일 충동적으로 예매해 보러 갔던 터라 홍아센 대극장 2층에서 봤다. <헤드윅>은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로 주인공이자 극 중 가수인 헤드윅이 관객들과 소통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식이다. 그렇다 보니 2층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는 입장에선 헤드윅이 객석에 내뿜는 에너지를 전달받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록 장르의 넘버들이 밴드 사운드와 섞이니 가사를 알아듣는 것도 어려웠고. 해서 여러모로 나에겐 아쉬운 작품으로 남았는데 올해 극 중 헤드윅의 남편이자 드랙퀸을 꿈꾸는 이츠학 역으로 내가 사랑하는 배우 이영미 씨가 돌아온다고 해서 한 번 더 시도해보자는 마음으로, '오리진 오씨'(<헤드윅> 대표 넘버인 'Origin of love'를 그냥 자기 노래처럼 소화한다는 뜻)로 불리는 오만석-이영미 페어로 보러 갔고, 나는 내가 <헤드윅>을 보면서 그렇게 울 줄 꿈에도 몰랐다. 무대 위, 푼수처럼 웃다가 불같이 화를 냈다가 아이처럼 엉엉 우는, 저 종잡을 수 없는 인간 헤드윅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헤드윅을 만든 시간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그래서 헤드윅을 이해했다. 그 곁에서 누구보다 헤드윅을 증오하고 한편 사랑하는 이츠학의 마음도,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그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오만석 헤드윅을 고정으로, 이영미 이츠학과 제이민 이츠학의 공연을 봤고 배우마다 캐릭터의 성격이 달라지니 당연히 페어의 관계도 달라지고, 볼 때마다 이야기의 해석을 새로이 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시즌 <헤드윅>에서 경험한 큰 매력이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건 <헤드윅> 서울 공연 총 마지막 회차에 커튼콜 후 음악감독님의 깜짝 제안으로 즉석에서 불러준 오만석 헤드윅의 'Origin of love' 어쿠스틱 버전. 2년 만에 처음 불러본다면서 나지막이 "아가야"로 대사 시작하던 오만석 헤드윅의 그 빛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오만석 씨는 필히, <헤드윅>과 종신계약 맺으셨기를 바랍니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올해 처음 본 작품 중 하나이다. 우란문화재단에서 짧게 올린 초연 당시 반응이 워낙 좋았던 터라 다시 오면 꼭 보리라 다짐했던 바다. 과연 시작부터 압도됐다. 소품이나 장치를 최소화한 무대 위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여자 배우 열 명이, 귀에는 익숙하지만 뮤지컬 넘버로서는 생소한 스페인 음악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는 광경 자체가 신선하고 또 중독적이었다. 작품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1930년대 초반 스페인 어느 마을에 권위적인 어머니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 딸들이 사는 모습을 그린다. 오래전에 쓰인 작품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선 재해석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지점에서 <베르나르다 알바>가 관객들에게 어떤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는지는, 사실 크게 실감하진 못했다. 다만 연출과 음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분위기, 그걸 온몸으로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열연에 감탄했다.
연극 <엘리펀트송>은 내 '입덕극'이자 '본진극'이다. <엘리펀트송>은 정신병동에 입원 중인 마이클 알린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주치의의 행방을 두고 병원장 그린버그와 게임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전개된다. 자유를 원한다는 마이클이 시종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말들만 내뱉는 걸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호기심은 집중을 부른다. 그러다 마침내 분명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충격을 받을 새도 없이 이야기가 끝난다. 나는 마이클로 하여금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를 이해하게 됐다. <엘리펀트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는 일은 힘겹지만 한편 위로가 된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배경으로 해서, 겨울이 되면 생각난다.
뮤지컬 <빌리엘리어트> 커튼콜 중 / 본인 촬영
뮤지컬 <빌리엘리어트>가 왜 스테디셀러로, 남녀노소 불문 전 연령층에 사랑받는지 보자마자 알았다. 내용이야 워낙에 유명하고, 내가 가장 감탄한 점은 배우들의 호흡이었다. 거의 모든 넘버와 장면이 배우들의 호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비단 주인공 빌리 역의 어린이 배우뿐 아니라 출연진 모두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을지가, 무대를 보면서 절절히 느껴진다.
올해 내게 절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던져준 작품이다. 연극 <마우스피스>는 창작 윤리에 관한 이야기이자 지독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편 사랑 이야기로도 볼 수 있겠다. 그만큼 텍스트가 꽉 차있고 덕분에 생각할 거리들이 많다. '좋은 사람' 내지는 '옳은 결정'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에 대하여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다. 드라마, 영화, 소설, 연극, 뮤지컬, 동화 등등 콘텐츠를 만들거나 소비하거나 단 한 번이라도 경험이 있다면 봐야 한다. 그냥 전부 다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음악극 <태일>은 제목 그대로,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다. 달리기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부터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앞장섰던 날들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굉장히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태일 목소리의 배우 한 명과 태일 외 목소리를 맡은 배우 한 명, 단 둘이 무대를 채우는데 빈틈이 없다. 특히 태일 외 목소리 역을 소화하는 여자 배우들이 인물마다 휙휙 성대를 갈아 끼우듯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연기가 빼어나 자연스레 몰입된다.
국내 초연으로 공연 중인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감히, 올해의 라이선스 뮤지컬이라고 평하고 싶다. 그리스로마신화 속 하데스-페르세포네,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미국의 경제대공황 시대로 재해석해 풀어내는데 신화와 현대의 맞닿음,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 '현실'과의 맞닿음까지 느껴진다는 점이 매우 새롭고 이 점은 고전을 원작으로 하는 대극장 뮤지컬들이 막장 요소가 넘치거나 다소 축약이 심하고 전개가 급한 스토리인 것을 고려했을 때 아주 큰 강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재즈를 기반으로 한 넘버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밴드 라이브와 어우러져서 흥을 돋우고, 회전하는 원형 무대나 조명의 활용 등 연출 면에서도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템플>은 신체연극이다. 현대무용이나 행위예술을 연상케 하는 신체 동작을 적극 활용한 작품이라 그렇다. 배우들이 몸으로 글자를 만들거나 동물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보면서 무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극 중 주인공 템플 그랜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결되며 캐릭터에 이입하게 한다. 템플 그랜딘은 실존 인물로, 어렸을 때 자폐 진단을 받았으나 그 덕분에 동물학자가 된 사람이다. 연극은 템플이 훌륭한 동물학자로 성장하기까지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인상적인 점은 템플과 그의 어머니가 자폐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폐를 받아들이고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며 어우러져 살기 위해 노력한 데 초점을 맞췄다는 데 있다. 특히나 템플 역의 배우 김주연 씨 연기가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는데 정말이지 김주연 아닌 템플은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올해의 발견. 뮤지컬 <웨딩플레이어>가, 2021년 관극으로 얻은 가장 큰 성취다. 바로 이전에 리뷰를 쓴 작품이기도 하다. 별 볼 일 없는 내 삶도 어쩌면 밝게 빛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작품이다. 1인극으로 배우 혼자 이끌어야 하는데 전혀 허술한 부분 없이 전개도 넘버도 알차고, 무엇보다 보통의 삶에서 끄집어낸 특별함이 감동적이었다. 단연코, 올해 본 작품 중 여러 면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준 공연이다.
어제 올해의 마지막 관극으로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을 봤다. 제목은 주인공 '나'가 어떤 계기로 하여금 작성하게 된 리스트의 제목이기도 하다. 나에게 빛이 나는 어떤 것, 순간에 대해서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내 생각했다. 만일 내가 리스트를 적는다면 첫 번째는 이렇게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