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그레X 년'이라는 말이 있다. 2015년이었을 것이다. 육아휴직 후 팀 이동 복직을 통해 같은 팀이 된(때문에 얼굴과 이름도 몰랐던) 모 선배에게 5개월가량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고과를 뺏겼다. 그 프로젝트는 내가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담당했던 것으로 당시에 선배는 복직 전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없었고, 게다가 같은 팀도 아니었으므로 업무를 했을 리가 객관적으로도 만무했다. 하지만 연말평가에서 선배는 프로젝트의 공로를 우수하게 인정받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내가 받은 평가는 중간 정도였다. 전산의 실수인가? 5개월 간 일주일에 3일은 꼬박 외근을 하며 마쳤던 업무였던 터라 무척 당황스러움이 컸다. 선배에게 직접 물었다. 선배는 방긋 웃으며 '글쎄 나도 평가 기준은 잘 모르겠는데, 이 업무를 네가 했다는 증거 또한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라는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대사를 읊었다. 관리자의 농간인가? 팀장님께 여쭈었더니 '세상엔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더러 생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대표님의 딸인가? 이사님께 확인을 요청드렸더니 '건방지다.'라는 맥락과 상관없는 리액션이 돌아왔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해당 프로젝트를 다른 구성원과 협업 없이 외주 제작사와 내가 진행했다는 것은 사내에 웬만한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 기획을 통과시켜서 매주 업무 보고를 들으며 진행상황을 파악하셨던 팀장님마저 내가 했던 업무가 아니라고 하시니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었다. 마치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어떠한 계략을 짜고 치는 것 같았다. 업무 고과가 아예 엉뚱한 사람에게 가 있는 것도 이해가 어려웠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고 의지하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과의 신뢰가 철저히 깨졌다는 것이었다.
'실망하지 말아요, 여기 원래 그래요.'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공감해 주셨던 옆자리 대리님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도 9년간 재직하며 그동안 여러 번 당했었다는 무용담과 함께. 하루에도 열두 번은 어떤 각도로 사직서를 휘날리면 간지가 날지를 고민하던 나에게 대리님의 이야기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 외에 과거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몰랐겠단 생각은 분위기상 파악을 했었지만 특히나 대리님은 모든 일을(다소 부당한 업무도 포함하여) 그 흔한 불평불만은 전혀 담지 않고 처리하시던 분이었기에 내가 상상했던 경험자 후보에는 1차로 탈락된 상태였다.
'경력자로 입사해서 이 회사에서만 9년을 일했는데, 직급이 대리인 것부터 이상하단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그렇다.
그 어떤 회사도 만 11년 차 직원에게 대리라는 직급을 요구할 것 같진 않았다.
'OO 씨는 아직 열정이 있는 게 단점이에요. 어차피 남의 일인데 열정을 버리세요, 그리고 그냥 빙그레X 년이 되세요. 그럼 속 편해요.'
하지만 나는 이날, 속이 편해질 수도 있다는 대리님의 솔루션을 반납하고 팀장님께 퇴사 의사를 밝혔다.
이곳은 나를 고용할 '자격이 없다'라는, 대리 2년 차치곤 꽤나 멋진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러나 그 후에도 꽤나 많은 날 동안 대리님이 말씀하신 '빙그레X년'이라는 표현은 내 곁을 자주 맴돌았다. 뒤통수를 많이 맞았단 뜻이다. 세상에서의 솔직과 열심과 진심은 많은 경우에 적당하고 요령 있는 가식 앞에서 쉽게 패배했다. 그러나 여전히 '빙그레X년'에 동참하긴 싫었다. 본질적으로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을뿐더러 표정관리도 안되기 때문에 이미 예선에서 낙오했으며, 극단적인 설정 이긴 하지만 솔직히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 마지막 순간이 앞 뒤 다른 가식 덩어리인 채 끝난다면 얼마나 후질까라는 상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앞 뒤가 꼭 달라야만 할까. 그래야 관계에서도 사회에서도 타인보다는 조금 더 똑똑하고 발 빠르게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며 사랑받을 수 있고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는 걸까. 아직도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답답해진다. 애초에 왜 이런 것들로 굳이 '이기면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지, 그리하여 종국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얻기는 한 건지 묻고 싶다. 그렇게 만족스럽다면 지금 당신의 우울과 결핍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라는 추가적인 질문과 함께.
최근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진심에는 더욱 집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2015년에서 2023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뒤통수를 많이 맞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통수 맞는 것이 예전처럼 많이 실망스럽고 억울하지는 않다. 부끄럽지 않은 소신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매우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