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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Kim Jan 26. 2020

8. 내게도 잊을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다면

     어려서부터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기억하고자 하는 순간의 오고 갔던 대화와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과 행동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세세히 기억하는 덕에 과거의 일을 가지고 친구들끼리 내기라도 하게 되면 나는 늘 이겼다.

     좋은 기억력은 특정한 순간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내 의지로 생각하는 순간은 주로 좋았던 기억들이다. 따뜻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당시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지금은 무지개 다리를 건너간 강아지와 봄날에 마당에서 햇볕을 쬐면서 앉아있던 평온했던 기억처럼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순간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할 때는 다시 눈을 떴을 때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문제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순간도 계속 생각난다는 사실이다. 내 의지가 아닌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힘든 기억은 언제나 괴롭다. 잠에 들려고 할 때, 밥을 먹을 때, 양치질을 할 때. 일상생활 속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훅 들어오는 괴로운 기억들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여러 번 반복해서 힘든 순간을 떠올리다 보면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한테 왜 그랬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기억 속 대상을 죽을 만큼 미워하게 되는데 해결되는 건 없이 내 속만 더 상하고 만다.

     힘든 기억의 반복 재생은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빈도며 강도가 더 심해졌다. 소정의 월급은 내 성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상사나 동료 또는 후배와 함께 지낸 시간에 대한 위로금인가 싶을 정도로 회사 생활은 늘 경험과 예상을 뛰어넘는 이상한 사람들과의 연속된 사투였다. 비도덕적인 임원, 엄한 데 화풀이해대는 상사, 내로남불이 따로 없는 졸렬한 선배,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후배, 일을 떠넘기는 동료, 욕설로 공격하는 민원인들까지.

     회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미워하다 보니 악몽처럼 연속으로 떠오르는 괴로운 기억 때문에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하는 월요일은 잦아졌고 반복되는 소화 장애로 정상적인 식사조차 어려워졌다.

     힘든 기억도 내 삶의 일부겠지만, 영화 속에서처럼 내게도 무언가를 잊을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다면 마음에 상처를 남긴 순간을 하나만이라도 잊어버리고 싶다. 괴로운 기억에 침잠해가는 건 스스로 병을 키우는 일이니까. 잊혀진 기억의 자리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따뜻한 기억을 한 번 더 떠올리며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사람답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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