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부족시기 때 전공의 대신 당직을 서다
1월이 되면 치프 전공의들이 전문의시험공부를 위해 근무에서 빠지고 나머지 근무공백은 남은 사람들끼리 채우게 된다. 이것을 전공의 "인력부족시기"라고 한다. 예전에는 4년제라서 남은 3개의 연차와 펠로우들끼리 어찌어찌 업무공백을 메꿨는데 이제는 외과 전공의 3년제라 남은 2개의 연차와 펠로우들, 그리고 젊은 교수진들까지 갈려가며 업무공백을 채운다.
게다가 겨울은 건강검진철, 추운 날씨로 인한 심장마비/뇌졸중 증가 등으로 항상 수술이 많았다. 그냥 12-2월은 죽었다고 생각하며 일하는 기간이다. (거기에 덤으로 연구비공모시즌도 1-2월로 겹친다.)
우리 병원은 운이 좋게도 펠로우를 마치면 당직은 안 한다. 전공의와 전임의가 그나마 많은 큰 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장점이지만 문제는 당직이 아니어도 필요하면 시도 때도 없이 응급환자를 보러 불려 온다. 그래도 병원에 상주해야 하는 당직을 서는 것보다는 낫다.
올해 전공의 인력부족시기 때 당직을 설 교수들 중 자원자를 구하는 공고가 내려왔다. 안 그래도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오랜만에 당직비 좀 벌어볼까… 어차피 연구 관련 숙제가 많이 쌓여서 퇴근 후에도 일해야 하는데 당직 선다고 뭐 크게 달라지나? 차라리 당직비도 벌면서 틈틈이 당직 때 연구 숙제 마무리하자.
"--라는 마인드로 당직을 많이 신청했어. 은설이는? 너도 신청했어? 같은 날로 하자!"
혼자보다는 함께가 좋겠다는 마음에 옆에 있던 후배 은설이한테 물어봤다. 은설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것을 바로 일 중독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생님..."
"아냐 어차피 큰 차이 없어! 그리고 사실 사고 싶은 것도 있고..."
최근에 맥북프로 M3가 나왔는데 좋아 보이더라고. 은설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낸 후 한숨을 쉬었다.
"전 돈을 줘도 안 서고 싶은데... 그래도 위에서 눈치 주면서 시키니 몇 개 하기는 해야겠죠. 선생님이랑 같은 날짜로 맞출게요!"
"그래그래! 야식도 시켜서 전공의 애들이랑 먹자. 크으.. 옛날 생각난다."
병원이라는 곳은 수직사회다. 처음 입사하게 되면 그 연차에 맞는 일이 있고 연차가 올라가면서 하는 업무도 달라지고 일도 조금은 편해진다. 이게 정말 고도의 가스라이팅인 게 원래 전공의 1년차 들어오면 멋모르다가 1년차 후반에 정말 다 때려치우고 관두고 싶어 진다. 그러다가 2년차 되고 1년차 후배들이 오니 좀 업무가 나아진다. 그렇게 버티다가 또 2년차 후반부에 다 때려치우고 나가고 싶어 진다. 이 시기만 견디면 3년차가 된다. 3년차가 되면 또 일이 달라지고 잡무랑 당직도 줄어서 할만하다가 또... 그러다 치프되고 펠로우 끝나고 버티다 보면 어느새 대학병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심리란게 일이 바쁜 것을 떠나서 젊었을 때 했던 "잡일"들은 안 하고 싶어 진다. 대표적인 예시로 "입원전담의"라는 직책이 있는데 줄어드는 외과 전공의들을 대체할 수 있도록 입원전담의를 뽑아서 외과 전공의들이 1-2년차 때 주로 했던 병동 주치의일을 분담할 수 있도록 만든 직책이다. 교수처럼 대우해 주고 보수도 오히려 다른 외과 교수들보다 더 많이 준다. 일도 칼퇴할 수 있도록 환자 숫자도 조정해 주고 어떤 병원은 2주 일하면 2주 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도 도입되어 있다. 그런데도 외과 입원전담의들을 구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일이 편해도 1-2년차때 했던 상대적으로 허드렛일처럼 느껴지는 일을 평생 하기엔 싫은 것이다.
막말로 그것을 우리는 "주치의잡(job)"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치의는 "주 치료 의사"에서 쓰는 그 주치의가 아니라 병동에서 오더와 드레싱과 입원환자관리를 하는 일을 말한다. 물론 중요한 일인데 외과를 선택한 이상 보통은 집도의를 꿈꾸지 평생 병동주치의를 꿈꾸지 않는다.
당직이 시작되고 후배 전공의한테 인계를 받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몇 년 사이에도 시스템이 계속 바뀌다 보니 익숙한 듯 달랐다.
"그래서 선생님 여기 콜폰이고요 지금은 응급실에 특별한 환자는 없어요."
"그 병실이 있는지는 어디다 전화하더라? 병실이 없으면 보통 어디다 연락해??"
"요즘에 기저질환 없는 맹장염이나 담낭염은 송하병원으로 주로 보내요. 거기가 연락처도 이 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 열심히 함 해볼게!... 근데 수술 스케줄 변경이 필요하면 어떻게 해야 해?"
이제는 역으로 전공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은설이도 옆에서 인계를 받았다. 요즘 병동에서 자주 쓰는 약이나 수액 오더를 들으면서 공부하고 있었다. 주치의잡도 트렌드와 유행이 있었다.
난 병동환자를 보는 것보다는 응급실 환자를 보는 게 훨씬 자신 있어서 거기에 지원했다. 응급수술도 평소에 많이 했었고 병동 환자는 각 집도의 교수님들의 프로토콜취향이 있는데 그걸 하나하나씩 다 인계받기도 귀찮았다. 응급환자는 오히려 급하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만 잘 내리면 되었고 정 당직 펠로우 선에서 수술하기 힘들다고 하면 내가 하면 그만이었으니.
당직인 전공의가 나와 은설이를 포함한 당직자 카톡방을 만들었다. 거기에 오늘 각 분과별로 주치의들이 정리한 인계사항들이 올라와있었다. 카톡방이 생긴 겸 나는 물었다.
"이따 9시쯤 야식 먹을 사람? 제가 살게요."
반응은 역시 뜨거웠다. 그렇게 몇 차례 응급 콜들이 지나갔고 오늘 밤은 무사히 지나는 것 같았다. 원래 돈은 선배가 내고 야식을 준비하는 것은 후배가 한다. 전공의들이 먹고 싶은 야식메뉴를 고른 뒤 의국에 세팅해 두었다. 오늘은 무난하게 치킨이었다.
난 편의점에서 사 온 딸기 우유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자 얘들아 내공 충전할 시간이다!"
"오 감사합니다."
우리 병원엔 딸기우유를 먹으면 내공.. 즉, 운이 좋아진다는 미신이 있다. 모두 딸기우유를 홀짝 하며 오늘 밤 별 일 없이 지나가기를 내공의 신?에게 기도드렸다. 이 숭고한 의식이 마친 뒤 각자 치킨조각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당직이 아닌데도 퇴근을 못 해 병원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함께 먹고 있었다.
"동건이는 아직도 퇴근 안 했어? 일이 아직 덜 끝났나 봐?"
"아 네.. 동의서들 받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어서. 아직 오더도 좀 남았어요."
"진혁이는? 넌 주치의 아니잖아?"
진혁이는 응급실을 내게 인계해 줬던 전공의다. 얘는 주치의도 아니라 밀린 일이 없을 텐데 왜...
"아 저 내일 집담회 발표여서 발표준비 때문에 오늘은 병원에서 자려고요. 사실 아까 일 끝나고 잠들어서 이제 시작해야 하지만."
진혁이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치킨을 먹었다. 그래. 그것이 진정한 레지던트(resident)지. 우리들에겐 병원이 곧 세컨드하우스나 마찬가지였다. 지박령 같은 삶. 애매하게 늦게 퇴근할 바엔 어차피 새벽같이 출근할 거 당직실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다들 고생이다. 치킨이라도 많이 먹어라. 자 일단 동건이가 저기 방 문을 닫고..."
야식을 먹으면서 본격적으로 수다 타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다른 교수님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교수사무실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 일단 문을 닫는 것이 안전했다. 특별히 나쁜 내용의 뒷담화를 한다기보다는 개그의 소재로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데 아무래도 교수님 귀에는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
일단 내용의 80%는 성대모사이기 때문이다. 이게 전공의들의 소소한 삶의 낙이다.
전공의들은 마치 재롱잔치를 부리듯 자신들만의 개인기성대모사를 뽐내며 나와 은설이를 즐겁게 해 주었다. 치킨을 사준 보람이 있구나. 짧지만 배꼽 빠지는 시간이 지난 후 적당한 타이밍에 다들 각자 평온한 밤이 되길 바란다며 마무리했다. 나랑 은설이는 교수당직실로 돌아갔다.
"우리도 일단 빨리 자자. 밤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리고 우리는 콜폰을 머리맡에 두며 잠을 청했다. 그 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