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5
우리는 왜 본질 너머에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는가? 우리 앞에 놓인 본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들은 본질이 되기까지 수많은 탐구와 발현의 결정체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본질 너머에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본질의 부정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반대로 본질의 순수하고 집요한 탐구도 본질 너머에 본질로 다가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질 너머에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본질의 틀을 깨기에 아주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그 부정이 새로운 본질을 형성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집요한 탐구과정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부정한 본질의 증명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헤드폰에 본질을 부정해보자.
헤드폰의 본질은 소리의 전달에 있는데 그 전달이 타인에게 영향이 가지 않게 하는 것에 본질이 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므로 헤드폰의 본질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오로지 나에게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본질을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우리는 헤드폰이라는 분명한 이미지의 이데아를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러한 이미지여야 하는 것인가? 만약에 내가 듣고자 하는 소리를 타인이 듣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타인의 귀를 막는 것 또한 방법이 아닌가.
이러한 방식으로 헤드폰의 본질을 부정하게 되는데 이는 헤드폰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부정을 적용할 수가 없다. 자신을 위해서 모든 타인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불합리하다. 하지만 기존의 나만이 소리들 듣는 것에는 새로운 본질을 제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의 가치는 다수의 공감과 선호가 필요함을 알기에 이는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으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을 해볼 수도 있다.
소리를 듣는 영역에서 보는 영역으로 바꾸는 것이다. 보는 것은 소음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헤드폰이라는 장비가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은 귀가 아닌 눈으로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본질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듣는다는 것은 귀를 통한 청각을 이용한다는 기존의 본질마저도 뒤엎는 새로운 본질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 창조는 현재의 현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므로 발상 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 놓인 굴레에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고, 그 익숙함은 당연함으로 여기므로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본질 너머의 본질에 다가가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청력으로 듣는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감각으로 청력으로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새로운 본질을 열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청력이 있는 것은 듣는다는 것의 감각으로 여러 신호나 징후를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듣지 않고도 대처할 수도 있다면 그것이 진화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까지 우리는 청력이라는 본질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족하기에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이미 형성된 본질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기에 본질 너머를 생각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고정관념이라고 얘기한다. 고정관념은 왜 생기는 것인가. 개인의 반복되는 경험과 대다수가 공유되는 경험이 발생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관념의 형태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질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변하지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고정관념이라고 부르는 본질들마저도 한순간에 바뀌는 경우가 생긴다. 그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 본질 너머에 본질에 다가갔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깨진 관념은 새로운 고정관념을 만들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본질 너머에 다가갈수록 관념들마저도 새로운 본질로 탈바꿈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변화 혹은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기존의 본질의 원형에 다가갔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