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4일 : 아무도 여행하지 않는 도시, Limerick에 가다
Dear diary.
지난 주 아일랜드의 한 도시, 리머릭으로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어. 지도상으로는 아일랜드의 중심, 크기로는 더블린, 코크에 이어 3번째로 큰 도시. 존과 함께 아일랜드 이곳저곳 여행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데, 우습게도 리머릭은 우리 둘 다 처음이었어. 아, 사실 나는 결혼 전 가본 적이 있으니 둘이 함께 한 여행으로 처음이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8년 전인가 혼자 아일랜드 이곳저곳을 배낭 메고 여행했었거든. 일주일 남짓의 여행을 마치고 더블린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곳이 바로 리머릭이었어. 그땐 시내 위주로 돌아다녀서인지 더블린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꼈고, 그래서 특별한 인상이 남아 있지 않았어.
사실 산업도시인 리머릭은 비즈니스면 몰라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휴가 때 찾는 곳이 아니야. 섬나라 아일랜드에 푸른 아틀랜틱해와 초록 들판의 멋드러진 풍광을 품고 있는 지역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내륙도시에 대도시인 리머릭으로 여행을 가려 하겠어? 게다가 리머릭은 80-90년대 폭력조직 범죄가 잦은 지역으로 악명이 났던 곳으로, 이후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훨씬 말끔한 모습을 갖추었지만 아직도 어딘가 부정적인 이미지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우리는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어. 사람들의 입에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리머릭. 사람들이 '관광'으로 찾지 않는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어떤 공기가 흐르고 어떤 특색을 지니고 있을까?
리머릭으로 가는 길, 글렌한사드의 앨범 <Didn't He Ramble>을 들으며 한산한 도로를 막힘 없이 달렸어. 가식 없고 진솔한 가사와 마음 따라 흐르는 멜로디가 평온한 모습의 들판과 참 잘 어울렸어.
중간 중간 휴게소에 들렀다 갔는데도 2시간만에 시티센터에 닿았어. 마침 점심 시간도 되었고 호텔 체크인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미리 검색해 둔 채식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지. 테이블이 3개밖에 없는 작은 식당이 조지안하우스 안에 자리잡고 있었어. 대기줄이 길어 꽤 기다려야 했지만 대부분이 테이크아웃 손님이라 운 좋게 테이블이 하나 남아 있었지. 렌틸콩과 익힌 채소로 만든 단백한 파이와 간이 심심하고 신선한 샐러드가 딱 내 입맛에 맞더라. 점심을 먹은 후 예약해둔 호텔에 짐을 풀었어. 존이 잠시 쉬겠다며 침대에 눕더니 어느새 코를 골기 시작했어. 운전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야. 나도 그의 옆에 누워 호텔방 창문으로 보이는 도심의 건물들이 햇빛과 구름 속에서 여러 가지 색으로 바뀌는 모습을 말 없이 구경하다 스르르 잠이 들었어.
오후 4시쯤 호텔을 나선 우리는 먼저 시내 구경을 나섰어. 하지만 쇼핑센터와 레스토랑, 이런저런 상점들 대부분 더블린에서 본 이름들이라 금세 싫증이 나더라. "강 쪽으로 가 볼까?" 존의 제안에 우리는 샤논 강이 흐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이내, 더블린의 리피강보다, 코크의 리강보다, 골웨이의 코리브강보다도 넓은 강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졌어.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한 리머릭성이 우리를 환영하며 이리 오라 손짓하는 것 같았지. 강가를 따라 새롭게 조성된 리버워크 산책길과 리머릭성까지 이어지는 중세시대 성곽길은 예전의 '어글리 시티'라는 오명을 씻어주기에 충분하게 아름다웠어.
성에 도착했을 때는 문이 닫혀 있었어. 입장시간을 확인해 보지 않고 무작정 온 우리 잘못이지만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오면 되니까 뭐. 대신 성곽을 따라 이어진 좁은 골목들을 서성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데, '트리티 시티 브루어리(Treaty City Brewery)'라고 쓰인 녹색 간판이 시선을 끌었어. 이무런 장식 없이 심플하고 현대적인 서체만으로 트렌디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지. 더구나 맥아가 증류되는 쌉쌀구수한 냄새까지 슬며시 흘러나오니 궁금함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
안으로 들어가니 20대 청년 두 명이 씩씩한 인사로 우리를 반겨주었어.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듯한 그곳은 수제맥주를 만드는 로컬양조장이었지. 원래 입장료를 내고 양조장 투어와 5가지 수제맥주 테스팅을 제공하는 곳인데 그날 투어는 이미 끝났다고 그 중 한명이 말해줬어. 하지만 이럴 때는 무조건 들이대고 보는 게 장땡!
"내일 투어를 하고 싶은데 저희가 아침 더블린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혹시 파인트 한 잔만 마시고 가면 안되나요? 리머릭 수제맥주라니 맛이 정말 궁금하네요." "아, 네! 그럼 드시고 가세요."
나에게는 없는 존의 오지랖 덕분에 우리는 색색깔 맥주 탭 5개 앞에서 어떤 맥주를 맛보나 행복한 고민에 빠졌지. 하지만 부드럽고 깔끔한 맛을 선호하는 우리의 마지막 선택지는 역시 라거! 우리는 2층 난간 곁 빈티지한 소파에 앉아 1층 양조장에서 맥주가 익어가는 커다란 은색 발효탱크를 구경했어. 창문으로 은밀히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예뻤고 맥주는 기분좋게 시원했어.
다시 리버워크 산책길을 따라 시내로 돌아온 우리는 매콤한 인도커리와 붉은 와인으로 리머릭의 저녁을 자축했어. 그때쯤이었나봐, 어글리 시티 리머릭이 정다워지기 시작한 게.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푸짐한 아이리시 브렉퍼스트를 먹고 체크아웃을 하기 전 리머릭 성을 보러 갔어. 성 전체를 박물관으로 개조했는데 생각보다 전시 방법도 다채롭고 볼거리도 풍부해서 입장료 13유로가 아깝지 않더라. 중세 때 아일랜드의 무역거점 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힘과 부를 모두 가진 도시로 성장했지만,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족과 영국 제국의 아일랜드 차지하기 싸움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던 도시 리머릭. 이후 급격히 쇠락하면서 빈민층이 증가하고 범죄율이 늘어나는 등 역사에 그늘진 발자국을 남기고 말았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도시가 좋았어. 존도 그랬지. 리머릭이 좋다고, 너무 좋다고. 하루 더 있고 싶은데 돌아가야 한다며 툴툴거리는 존에게 내가 말했어. "걱정 마. 분명히 다시 오게 될 거야!"
떠나는 마음에 아쉬움이 커야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거니까. 다시 가고 싶다는 바람이 깊어지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