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후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뭔가 목적하는 바가 있는 글쓰기이기때문에 각종 논문과 참고 서적, 그간의 경험담과 회고 메모 등을 사전에 잔뜩 준비해서 오전 내내 집필에 매달린다. 내심 20여편 정도의 아티클을 묶어 책을 내고 싶은데, 현재 17화 정도 진도가 나간 상태이다.
그런데, 오늘은 도서관 자리에 앉자마자 아무 것도 하기 싫어졌다. 지친 것인가... 결국 아무런 생각없이 길을 떠나기로 했다. 주섬주섬 노트북과 폰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걷는 내내 거리는 빛이 환하다. 바람에 봄내음도 살짝 묻어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마스크 밖으로 웃는 표정이 움찔움찔 드러나는 것 같다. 이제 지긋지긋한 코로나 시즌도 변화가 있는 것일까. 카뮈의 '페스트' Chapter 5의 어느 날처럼...
무한속의 유한 존재...오늘 읽은 철학책 귀절 한 마디가 계속 뇌속에서 속살거린다. 우리네 인생살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싸우고 삐지고 토라졌는가. 무한이라는 바다의 까만 잉크 한 점이 우리가 골머리를 썩이는 것들이다. 갑자기 지난 30여년간의 조직생활동안 힘겨웠던 상황들이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점점이 사라진다.
버스를 탔다. 목적지가 없으므로 번호도 보지않았다. 운전석 옆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나니 마치 VIP가 된 듯한 느낌이다. 한참 달리고 보니 시골길이다. 먼 거리에서 아지랑이들이 스믈스믈 춤을 추고있다. 최근 따뜻해진 낮공기가 묽은 흙속으로 들어가 잠자고 있는 습기를 불러 깨운 모양이다. 계속 달리며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본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판단도 하지않을 것이다. 에포케!
버스를 내렸다. 이름모를 정류장 앞.
한참을 타박타박 걷다 보니 눈앞에 국밥집이 나타났다. 반찬 1천원, 안주 5천원 뭐 어쩌구 써있다. 간판이 새것인 것으로 보아 신장개업했나보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 턱 앉는다. 점심시간인데 아무도 없다. 아마 내가 첫 손님인갑다. 메뉴를 보니 순대국밥 8천원...생각보다 비싸다. 우리 동네는 점심에 아직도 5천원인데...아, 판단하지말랬지, 에포케!
국밥이 나왔다. 오호, 물반 고기반이다. 머릿고기가 꽉차고 남은 여분의 공간에 간신히 자리잡은 하얀 곰국이 바글바글 끓고있다. 어제 시술한 앞니 임플란트 자리가 아직도 욱신 욱신거리는데, 위장에서 보내오는 욕구는 쌩쌩하다. 뜨겁게 끓는 국물 한 모금을 숟가락 끝에 묻혀 맛을 본다. 흠...싱겁군. 새우젓을 반 숟가락 정도 넣고나서야 맛이 난다. 머릿 고기가 야들야들하다. 숟가락을 들고 본격적으로 전투태세에 몰입한다.
원래 절대 혼밥을 하지않는 성격인데, 이거 의외로 괜찮다. 상대방이 없으니 이야기꺼리를 만드느라 뇌 자원을 소비할 필요가 없어, 맛을 온전하게 느낄 수가 있다. 완벽하게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게 바로 혼밥의 묘미로구만! 맛이 있었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따봉 사인 한 번 날려준다.
계산을 하고 읍내 사거리에 맞닿은 꼬불꼬불한 국도를 따라 또 걷는다. 한참을 걷다보니 길가 깡마른 잿빛 가로수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나무들의 안쪽에서는 지난 가을내 벗어놓은 낡은 피복을 빨아 새 옷을 준비하고있겠지.. 내 눈에 닿는 사물들의 이미지가 어쩐지 또렷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어령 선생의말대로 관심, 관찰, 관계의 법칙에 따라 그들과 내가 한순간에 연결이 된 것일까.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열공하는 막둥이를 위해 길거리 붕어빵을 한 봉투 샀다. 날이 여전히 맑다. 이제 조금 있으면 본격적으로 봄바람이 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