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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Jan 23. 2023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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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지음


해가 지는 그곳은 야속하게도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텅 빈 미래였다. 책을 보기 전, 최대한 책에 대한 정보를 배제하고 보는 오랜 습관 덕에 이 책 속 공간이 러시아라는 것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러시아를 한번 훑은 경험이 있어 기억을 불러와 소설의 무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기차에서 내다본 러시아, 시베리아 벌판, 도리가 헤맨 그 길, 그 숲은 생명이 느껴지지만 살 수는 없는 공간이었다.


3월, 긴긴 겨울이 지나 겨우내 쌓인 눈이 녹을 거라 생각한 것도 러시아에선 무리였다. 블라디보스토크 광장에는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눈이 쌓여있었고 시베리아 기차의 차창밖은 점점 쌓인 눈높이가 높아져 가는 것을 보아 우리가 북쪽으로 이동 중임을 시각적으로 일깨워주었다. 소설 속 그들이 헤맨 러시아가 이때쯤일 것 같다. 3월보다 추웠다면 행군은 무리였을 것이고 여름을 기대할만한 정도의 적당한 추위였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근본적인 질문에 이르렀다. 이들은 왜 이 추위를 무릅쓰고 러시아로 향한 것일까. 물론 책 속에서 그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부여해 준다. 한국에서는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바이러스가 낫는다는 루머로 어린아이가 살기 힘들어서 국경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잘 납득이 가지는 않아 잠시 책을 덮고 베란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루머로 전국이 휘둘린다 하더라도 영어조차 안 통하는 러시아를 향하는 건 설득력이 약했다. 그러다 베란다 창문이 밖과 안을 막아주는 종잇장과도 같은 유리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 도리가 아빠가 살해당한 집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이웃집에서 유리를 깨부숴 들어와 미소의 간을 먹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각종 아포칼립스물에서도 실내에 고립된 생존자들의 이야기 혹은 실내에 고립되어 있다 자원이 떨어져 밖으로 향하는 이야기, 애초부터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생존을 이어가는 이야기 다양한 플롯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소설 속 인물들의 러시아행은 그렇게 이해받지 못할 결단은 아니었다.


자아가 비대해서인지, 작가가 아포칼립스물이지만 일상적인 감정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해서 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삶도 어쩌면 이 바이러스가 퍼져있는 아포칼립스와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물론 우리는 이에 비하면 육체적으로는 안전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며 덜 가진 것에 대한 위기감과 불안함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고 그러다 한 순간 현실을 잊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 잠시 고민을 내려놓는 순간도 갖는다. 남이 가진 통조림 음식과 내가 가진 닳고 닳은 신발과 같은 소설 속 사물들에서 나는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소설속 인물의 읊조림에서 현실의 희망을 얻게 되었다.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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