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좋아진다는데, 사는 모양은...
6학년 큰딸이 불쑥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얼굴에 복면을 쓰고 손을 뒤로 묶인 여자가 서 있었다. 이제 막 노안이 오려는 눈에 힘을 줘 초점을 맞추고 자세히 보니 사람이 아니라 반소매 티셔츠에 포대 자루 같은 치마를 둘러 놓은 전신 마네킹이었다. 팔이 없이 반소매만 나와 있는 마네킹이었는데, 복면처럼 천으로 얼굴 부분을 가려 놓아서인지 손을 뒤로 묶인 듯 착시가 일어났다.
마네킹은 오락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펀치 기계를 개조한 것이었다. 어느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학교 근처에 서 있는 그 기계를 보고 서명운동을 위해 올려놓은 거였다. 사람 모양을, 그것도 여자 옷을 입은 형상을 때리는 펀치 기계가 인권침해에 해당하니 없애 달라는 내용이었다. 딸아이는 그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 모양이었고 엄마 의견을 물어 왔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아이들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떤 날은 성실하게 대답했고, 어떤 날은 대충 얼버무렸다. 모르겠다고 솔직히 답한 날도 있었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며 질문을 되돌려 준 적도 많았다. 그 난감한 시간을 그럭저럭 잘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딸은 이제 어려운 문제를 던져 주고 있다. 어떤 때는 성희롱과 페미니즘에 관한 걸 물었고,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한 것을 묻기도 했다. 내가 진보 성향인지 보수 성향인지를 물으며 인터넷에 나오는 성향 테스트를 해 보자고 한 적도 있었다.
어려운 문제가 많았고, 정답 없는 토론을 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의견을 듣는 걸 좋아했고, 자신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길 바랐다. 어떤 주제든 가능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론을 낼 수 있도록 유도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내 의견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거였다. 아무리 어려도 세상을 보는 나름의 눈이 있을 텐데, 내가 쓸데없는 선입견을 심는 건 아닐까 싶었다.
언젠가 미투에 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왜 이렇게까지 서로 공격적인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딸이 이유를 물어 왔다. 내가 쓴 댓글도 아니고 그런 과격한 댓글을 쓰는 사람들은 나도 사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고른 답은 지금 시대가 ‘과도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서구에 비해 짧은 편이다. 게다가 독재로 인해 더 짧고 힘든 기간을 거쳤다. 경제는 급성장기를 겪으며 발전했지만, 경기 침체로 힘들어져 여러모로 불안정한 시대다. 해서 전쟁, 독재 등을 겪은 세대와 그런 세대를 영화나 글로만 배운 세대가 공존한다. 당연했던 윤리는 시대가 바뀌며 문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니 생각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율하는 과정에서 과격해지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혼란한 시기를, 너희는 힘들겠지만 거쳐야 할 거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제대로 답한 걸까, 나 스스로 답답했던 차에 『불확실 시대의 문학』에서 “21세기란 결국 20세기가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아니 그 이전 시대의 모든 미해결 과제(혁명‧자본‧제국주의 등)들이 동시에 작동되는 혼란의 시대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구절을 봤다. 임헌영 평론가만큼 세련되게 말하진 못했어도 영 엉뚱한 소린 안 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 옷을 입은 펀치 기계는 서명운동을 마치기도 전에 아예 사라졌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런 말, 저런 말, 이런저런 생각들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우리 아이들이 똑바로 걷고 있는 것 같아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들의 똑바른 걸음에 선입견이 될 잔소리는 보태지 말아야겠단 다짐을 해 본다. 현실은 도봉산으로 현장학습 다녀와 힘들다는 딸에게 “엄마 때는 깔딱깔딱 숨넘어간다는 북한산 깔딱고개까지 올라갔었다.”라고 해서 꼰대 소리를 듣는 엄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