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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Apr 08. 2024

엄마가 남겨 준 호박 세 덩이

2018년

OO대학 관계자가 텃밭과 연결해 두었던 문을 막아버렸다. 학교 땅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아이들이 크고 나도 바빠지며 텃밭을 내버려 둔 지 오래되었지만, 엄마가 무단으로 심어둔 복숭아나무는 담너머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꽃이 예쁘게 피었던데...




  “텃밭이 있는 집에 산다고? 서울 시내에서?”

  친정집 텃밭 얘길 할 때마다 나오는 사람들 반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살던 동네는 서울 시내라기엔 민망할 정도인 변두리에 도시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예전엔 개천에 빨래터도 있었고, 북한산이 바로 보여 공기도 좋았다.

  낡은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정겨워 보이던 동네가 어느 날부턴가 차츰 재개발되고 번지르르한 빌라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즈음 근처 여대에서 대학교 담장에 붙은 집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라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재개발 보상금보단 적은 돈을 받고 사람들이 이사했었단다. 학교에서 땅을 모조리 사들여 뭔가 지을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사들인 땅에는 나무만 심어 담을 둘러놓고 말았다. 듬성듬성 공터가 생겼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공터를 텃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친정 엄마도 조그만 밭농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상추 몇 포기, 그다음엔 고추 모종 몇 그루가 추가되더니, 오이, 가지, 호박, 열무, 콩 등등 어지간한 반찬 재료가 다 나왔다. 엄마는 밭에서 키운 상추로 온 동네를 먹일 판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해마다 담 너머로 엄마의 상추를 탐냈고, 어차피 우리 식구끼리 다 먹지도 못할 양이라 온종일 뜯어 퍼 주는 게 일이었다.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우리 집에 상추 떨어지는 여름은 없었다. 간암이 발병한 지 오래되었지만, 어쩌다 색전술을 받으러 입원할 때가 아니면 찜질방이나 복지관으로, 손주들 학교와 어린이집의 마중길로 늘 바쁘고 활기차게 다녀서 암 환자라는 사실을 거의 잊고 살았다. 뇌경색은 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수술 없이 잘 회복했지만, 친정아버지의 병구완을 더는 엄마가 할 수 없었다. 친정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면서 아이들 셋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남편 사업은 어려워지고 계속 맞벌이는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엄마가 계속 우리 집을 오가며 아이들을 보기는 어렵고, 혼자 계시게 하는 것보단 우리가 곁에 있는 게 낫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들이 들어선 텃밭은 놀이터도 겸하기 시작했다. 방문 사이에 매달았던 그네는 나무에 매달려 더 힘차게 흔들거렸고 친구네에서 얻어 온 미끄럼틀은 크레파스 낙서를 비로 씻어 내고 햇볕으로 덧칠해 막내아들의 새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각각 자기 밭을 정해 뭔가를 심고 키웠다. 엄마도 아이들 사이에서 생기를 찾았다. 엄마의 밭에서 얻어먹을 줄만 알던 나와 달리 큰딸은 감자를 심어 캐 먹었고 작은딸의 파는 잘라먹으면 또 자라길 반복했다. 막내아들이야 누나들 밭을 헤집다 혼나는 수준이었지만…….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엄마에게는 종종 낮잠이 필요했고 집안일은 거의 내 차지가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잠깐씩의 나른함을 떨쳐 가며 여전히 밭에 이것저것 심었다.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잘 키워 내지 못한 것이 호박이었다. 이상하게 엄마가 심은 호박씨만 호박을 못 맺고 호박잎만 무성했다. 옆집, 뒷집 아주머니들은 커다란 호박을 따서 “그 집 호박 안 열렸다며?” 하고 가져다줬다. 설거지하다 보면 부엌 창문 너머로 엄마랑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다들 저기 호박 옆에 가서 ‘호박아, 잘 열려라.’ 하고 얘기해 줘.” 하는 할머니 말에 아이들은 쪼르르 호박 넝쿨 옆으로 몰려가 호박이 듣네, 못 듣네, 나름대로 설전을 벌이며 호박에게 잘 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호박이 듣는지 안 듣는지야 호박만이 알 수 있는 일이고, 나는 엄마가 키우는 작물들과 소통하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는 경상도 아지매답게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었다. 뭘 해도 토닥토닥해 주는 법은 없었고, 상장을 받아 와도 퉁명스러운 타박이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 분이 키우는 호박에게 얘기하는 걸 보니 그동안 받아먹은 상추며 고추에 얼마나 정성을 쏟으며 살뜰히 보살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걸 고맙단 말 한 번 안 하고 당연하게 받기만 했다.

  하루는 엄마가 외출하며 안경을 두고 나갔다. 마침 집에서 나가려던 내게 전화해서 길 건너 할머니 댁에 맡겨 달란다. 그 할머니와 만나실 거라며. 알았다며 끊으려는데 “고마워.”라는 말이 들렸다. 본인 용건만 끝나면 바로 끊던 엄마의 예상치 못한 인사에 순간 당황해서 “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녀간에 고맙단 말 한마디가 이렇게 어색한 상황을 만들 줄이야.

  그 이후 유심히 보니 손자들에게 “고마워.” “예뻐.” “착해.”를 기본으로 이런저런 칭찬을 하고 있었다. 작물들과 손끝으로 소통하더니 손자들과도 예쁜 소통을 시작했나 싶었다. 당황한 내가 제대로 받아 주지 못하는 바람에 딸과의 소통은 다소 부족했지만.

  호박은 도통 열리지 않아서 엄마는 늘 투덜거리며 호박잎만 따 왔다. 호박과의 소통엔 결국 실패했던 거다. 그럼 뭐 어떤가, 호박을 맺지 못한 호박잎도 호박을 맺은 호박잎과 다름없이 맛만 좋은데…….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그날 하루 손자들의 재롱과 말썽을 내게 보고 겸 자랑을 했다. 어릴 때 집에 오면 엄마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종알거리던 나처럼. 모녀지간은 나이 들면 친구 같다더니, 친구랑 수다 떠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옆집에서 준 호박 반찬에 밥을 먹는 내게 말씀하셨다. 

  “야, 우리도 호박 쬐매난 거 하나 열렸더라.”

  그때 딸이랑 소통의 열매가 열렸던 걸까? 긴 암 투병 끝에 전이된 암이 다시 재발하여 2개월 선고 후 완화 병동에 있던 동안, 매일 서로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란 말과 함께 포옹을 나눴다.  

   

  엄마가 떠나시고 처음 맞는 여름, 텃밭에는 호박 넝쿨이 없다. 엄마 냄새가 남겨진 집 안, 남편을 기둥 삼아 올린 호박 넝쿨에 사시사철 청바지와 운동복만 입는 태권 소녀 선머슴 호박, 온종일 거울 앞에서 걸 그룹 댄스에 빠져 있다가도 정체불명 막춤을 선보이는 새침데기 호박, 누나들에게 뒤질세라 각종 애교를 장착한 미운 일곱 살 막내 호박이 땡글땡글 영글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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