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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계절 Oct 20. 2023

그 호텔 주방에는 도사님과 선생님이 있다

백수의 아르바이트, 나를 키우는 다른 경험에 대하여.  

아침 7시. 요 며칠 집 앞의 한 호텔로 바삐 걸어갔다. 동대문에 우뚝 서 있는 여러 가성비 호텔 중 한 곳, 그 안에서 매일 아침 뷔페가 제공되는 레스토랑의 주방이 그 목적지였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아르바이트를 왔는데요" 


호텔 한쪽 구석 주방에는 긴 나무젓가락을 휙휙 휘두르며 요리하고 있는 남성 분과, 눈웃음이 인상적인 여성 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짧게 인사를 했다. 


"이런 설거지를 해 본 적은 있어요?" 

"아니요, 없는데요..." 


그니까, 아르바이트는 근 20년 만인가.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알바를 해본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설거지, 집에서도 마지못해 몰아서 하는 영역의 일이긴 했다. 당근을 하다가 단기 알바 몇 곳에 지원한 것이 이 일의 시초였다. 가장 경험해 보고 싶었던 아이들 숲 체험 보조 교사, 한의원 보조, 온라인 마켓 제품 패킹, 뭐, 이런 곳들은 죄다 연락이 없었고, 딱 한 곳 연락이 온 곳이 여기였다. 


까짓 껏 설거지가 뭐라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 어리바리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왜 자꾸 장갑에 물이 들어가는가..), 눈치껏 주방 정리도 못했고(뭘 했다고, 왜 내 구역만 지저분한 것인가..), 동선에 방해가 되기 일쑤였다. 곧 익숙해진다 싶다가도, 쌓이는 설거지 그릇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아니, 아기 같다니까. 설거지며 살림이며 뭐 이런 거 안 해 본 티가 나니까 40대 어린아이 같은 거지" 

"아, 제가요? 집안일 안 해보긴 했는데 ㅋㅋㅋㅋㅋ그렇다고 이 나이에 아기라니요..ㅋㅋㅋ" 


(네, 뭔가 갑자기 상철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제가 그 40대 아가입니다. ㅋㅋㅋㅋ) 


주방에서 짬짬이 얘기를 이어갔는데, 알고 보니 이 주방에서 일하는 두 분의 본업은 도사님과 선생님이라고 했다. 한 분은 오후에는 점집을 운영하면서 쉬는 날이면 전국 산으로 기도를 올리러 다닌다고 했고, 또 한 분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다가 요즘은 개인 교습만 한다고 했다. 이른 새벽부터 업무가 시작되기에 본업 전에 아침 시간을 활용한다는 얘기였다. 


한 번은 수저를 닦고 있는데, 선생님이 툭 말했다. 

"나는 40대는 힘들지 않았는데, 50대가 되고 갑자기 일이 생기니까 이런 일이라도 해야 되더라고요. 50대가 되기 전에 돈을 많이 벌어둬요. 나이 들고 일하려면 힘들어. 투잡도 하고요!" 

"아.. 네. 돈, 중요하죠. 저는 투잡이 문제가 아니라, 잡이 하나도 없는데요 ㅋㅋㅋㅋㅋ"


손님이 많이 몰려서 수저를 먼저 닦아야 하나 수프 그릇이 우선인가 우왕좌왕하고 있던 날, 도사님이 내 자리를 꿰차더니 한참 대신하기 시작했다. 

"어, 이거 제가 할 일인데요. ㅠㅠ" 

"내일 네일이 어딨 어요. 바쁠 땐 다 같이 하는 거죠. 빨리 해버리고 같이 쉬는 게 좋죠." 


바쁠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사람이 모이고 일을 하게 되면, 그게 어디든 어떤 형태의 리더십과 팀워크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쉽게 내주고 보듬었던가 싶어 반성의 마음이 절로 들었다. 


주방을 대충 마무리하고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가, 도사님이 이 호텔의 다른 분과 쑥떡 쑥떡 대화를 하더라.

"아니, 경비 아저씨인데 이번까지만 일하고 그만둔다고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말씀하실 때마다 밥이나 김치를 조금씩 챙겨드렸거든요. 여긴 남으면 버리니까, 바로 여기서 드시는 거라. 일도 힘드신데.." 


내가 맡은 역할에 아주 서툴고, 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되는 경험, 오랜만이었다. 한 분야를 오래 했고, 언제나 앞서 걸어갔기 때문에 뒤돌아 보고 챙기는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설거지 알바가 뭐라고, 이렇게 배우게 되는가. 따뜻한 말 한마디, 사려 깊은 작은 행동 하나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 의미일 수도 있다. 살아간다는 건, 이 작은 다정함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일 수 있다. 


나를 성장하는 이끄는 작은 경험의 기회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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