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서평 에세이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by 와초 Wacho


2020년에 이 책을 읽고 썼던 글이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문제로 분노하고 있다는 게 씁쓸하다.

그때 나는 분노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정교하게, 더 멀리 보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나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뒤집힌 사회를 들여다보니 뭐든지 비틀어 생각하게 되었다. 가령 영화 <예스맨>을 보는데, 영화 내용보다는 예스’맨’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되고 화가 났다. 예스맨 클럽은 여성과 남성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클럽이지만, 예스‘맨’이라는 단어가 이 집단구성원을 대표한다. 이들은 ‘맨’으로 통칭된다. 또 어느 날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신호등 초록불 안의 걷고 있는 사람, 아니 남자가 눈에 보였다. 그 남자는 우리 사회의 모든 걷고 있는 사람을 대표하고 있었다. 일일이 다 거론하기도 힘들다.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연하게 수용해왔던가? 이 소설은 이러한 성의 사회적 위치와 관계를 아주 통쾌한 방법으로(남성에게는 공포스러운 방법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에게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이갈리아’라는 가상의 국가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갈리아에서는 우리 현실사회의 젠더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여성은 ‘움’, 남성은 ‘맨움’이라 불리며, 어떤 성의 인간이든지 일반적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움을 사용할 수 있다(예: 예스움). 이 곳은 가’부’장제가 아닌, 가’모’장제 사회이다. 보호가 필요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인내해야 하는 부성애를 요구 받는 쪽은 맨움(남성)이다. 가장이 되어 가정과 사회를 씩씩하게 책임져야 하는 쪽은 움(여성)이다.


그렇다. 이 책은 여성주의 책이다. 현실의 사회적 성 역할을 뒤바꿈으로써, 보이지 않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재치 있게 비틀어 보여준다. 움이 중심이 된 가부장제 사회에서 맨움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성장하며, 맨움해방 운동을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여성학 배경지식이나 관심이 없었더라도 가부장제 사회의 현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어떤 집단이든 상대를 지배하고 자신들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배논리가 필요하다. 현실에서의 남성집단이 그렇듯, 이갈리아에서 움들은 그러한 지배논리를 영리하게 구축하여 ‘움’중심적인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몸의 차이와 생명의 탄생, 임신가능성에서 시작한다.


“인류에게서 가장 중요한 성기-움의 성기-는 그래서 움의 몸 안쪽으로 보호되는 위치에 있답니다. 이것은 움의 성기가 맨움의 성기보다 훨씬 더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반면에 맨움의 성기는 바깥쪽으로 달려 있지요. 그 이유는 맨움 성기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맨움이 아무리 항의한다 해도, 생명을 부여하고 보호하는 자는 움이며, 움이 없다면 맨움은 소멸할 것이라는-그 반대는 아니지만-사실엔 변함이 없어요. 자연을 통틀어 수컷이란 창조물은 쓸데없는 사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답니다. 수컷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손을 생기게 하는 임무를 완수하고서는 죽게 되는 거예요.”


고등학교 선생님인 ‘노총각’ 올모스의 수업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이다. 자연의 섭리로 인하여 맨움은 우월한 신체와 생명 탄생능력을 갖고 있는 움의 보호를 받아야 하며,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에 의해 이갈리아의 사회적 체계와 젠더의 역할이 결정된다. 움의 부성보호(움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지목한 맨움이 갖게 되는 혜택과 의무, 그 맨움은 움의 하우스바운드로서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를 받는 것만이 맨움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맨움은 좋은 움을 만나 안정된 부성보호 하에 그녀의 아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맨움이 있어야 할 곳은 아이와 자기 아내를 보살필 수 있는 가정이며, 움은 가정의 지지를 기반으로 사회 내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이 사회에서 가족이란, 사실은 맨움의 노동 착취를 정당화하여 움의 가장으로서의 지배체제를 형성시키는 출발점이다. 사랑과 보호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권력구조를 미화하고, 맨움의 활동공간을 가정으로 한정시킨다.


이갈리아는 자연의 섭리를 지배 사상의 근거로 들었으며, 이는 우리의 성경과 닮아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이브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여자는 ‘이브’라는 최초의 여성에 의해 세상의 모든 원죄를 짊어지게 되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이라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이브는 그의 갈비뼈에서 탄생한, 태어남과 동시에 이차적이며 종속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이 금지한 금단의 열매를 먹었고, 남편까지 꾀어 하나님에게 불복종하게 만든 간악한 여자였다. 이에 따라 모든 여자들은 잉태하는 고통을 받게 되었으며, 남편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이갈리아 이론과 우리 현실의 이론에서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 인간 탄생의 과정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젠더의 계급이 생겨나고, 상이한 해석법이 온 인류를 지배하는 각자의 성차별적 문화와 사상을 만들어냈다.


소설의 주인공 페트로니우스는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했고, 그럼에도 수치심과 자책감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이를 들켰을 때, 이 불행한 사건은 오히려 맨움 혼자 위험하게 저녁까지 돌아다녔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며, 어머니에게마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가 연인 그로에게 폭행을 당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그로는 페트로니우스의 아이를 가졌고, 그에게 부성보호를 제안한다. 그러나 맨움해방운동을 시작한 그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며, 아이는 사랑으로 키울 수 있지만, 그녀와 결혼하여 평생 부성보호를 받으며 수동적으로 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에 자신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로 그로는 페트로니우스에게 가학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그는 그 이상의 폭력이 두려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로가 그와 동등한 관계를 가졌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움과 맨움의 관계에서 움의 어떠한 무법자적인 행동도 모두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자신의 몸과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권리를 잃어버렸으며, ‘움’ 그의 주인에게 그렇게 종속된다.


이렇게 여러 사건을 겪으며, 그는 점점 맨움 해방주의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와 그의 맨움해방주의 동료들은 수많은 움들에게 조롱을 받지만, 누구도 그들을 주저앉게 할 수는 없다. 움/맨움의 대립과 한쪽 성의 지배구조를 떠난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은 더 이상 현실의 불행을 탓하기 보다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노르웨이에서 1977년에 출판되었다. 이미 4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고, 부조리한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맨움해방주의자들처럼 우리 현실에서도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이 사회의 부당한 성차별과 지배구조에 대해 소리치고 있다. 우리 억울하다고, 동등한 인간이며 평등한 권리를 달라고, 그리고 같은 여성들에게도 말하고 있다. 우리도 남자들처럼 강한 자매애로 뭉쳐서 더 큰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만 받아들이자,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질서는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우리 삶과 모든 행동, 모든 언어에 깊숙이 침투해 있지만 우리는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제 2의 성’이 아니다.


*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당연함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므로.

* 혹은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를 보는 것도 추천한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