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어떤 것을 그리워하고, 원하고, 바라는 마음. 말 그대로 동경.
동경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원하는 만큼 두려움도 커진다. 대부분 동경의 대상은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이므로, 그것을 진짜 가졌을 때의 나를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그것을 성취했을 때 현실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부분과 생각지 못한 감정은 어렴풋이 두려움으로 뭉쳐 동경의 귀퉁이에 숨겨 놓는다.
내게도 많은 동경의 산물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이렇다.
내가 꿈꾸는 나의 세계에는 뜨거운 햇살, 팔 벌려 안아도 안아지지 않는 큰 나무, 내 손 뼘보다 큰 나뭇잎, 파란 하늘, 한가로운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
20대 초반에 캘리포니아와 스페인(여러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겨울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여름을 매우 좋아하는 나에게 그 두 곳은 늘 그리던 꿈의 나라였다. 그래서였는지, 해외생활에 대한 동경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추억인 듯, 동경의 모습인 듯 그렇게 말이다. 그런 곳이라면, 가만히 서서 태양을 온몸으로 휘감는 것 하나만으로 나의 삶이 풍족해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겨우 몇 개월 지낸 주제에 말이다.
결혼한 지 삼 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와이프, 우리 2년간 터키로 파견근무 다녀올까?”
남편은 회사에서 내게 급하게 카톡을 보냈다. 실제로 남편이 급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늘 급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나는, 타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늘 급하게 받아들이고 급하게 이해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 남편은 어떤 마음으로 내게 메시지를 보냈을까? (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 나는 조금의 고민 없이 답장을 보냈다. “좋아!”라고 말이다. 그리고 남편도 너무 쉽게 나의 대답을 받아들였다.
결국 터키 주재원으로 확정 났다. 남편은 친구들과의 송별회를 시작했고, 남편보다 늦게 출국하는 나는 해외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살고 있는 집을 부동산에 내놓고, 자동차를 팔고, 정보를 알아보고 그런 일들 말이다. 쉽게 결정했던 파견근무만큼 부동산 거래와 중고차 거래가 쉽게 성사되는 듯했다. 운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가계약을 끝내 놓은 상태에서 남편에게 출국 확정일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9개월간 터키에서는 확정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운은, 내가 마음대로 집과 자동차 매매 계약서를 쓰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만약 썼다면 우리는 약 1년간 집도, 차도 없이 떠돌 뻔했으니까. (가계약은 2주가 지나고 자동파기되었다.)
확정일을 기다리는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내 안을 어지럽혔다. 걱정이 많은 성격인 나는, 터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걱정하며 지냈었다. IS 테러를 걱정했고, 터키어 책을 보며 한숨을 쉬었고, 이스탄불 부동산 사이트를 들어가 매물을 체크했다. 떠나고 싶은 마음, 남편과 내가 전부가 될 새로운 세계, 외국에 대한 동경 뒤에는 새로운 환경,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렇게 9개월을 기다리다 연락 없는 터키행을 거두었다.
이미 마음이 들 뜰대로 뜬 우리 부부는 다른 나라를 결정하게 되었다.
“와이프, 인도네시아가 좋아, 베트남이 좋아, 멕시코가 좋아?”라고 묻는 남편에게 이번에도 역시 나는 고민 없이 단번에 말했다.
“멕시코만 아니면 돼. 멕시코는 절대 안 가.”
(당시 뉴스에 마약 카르텔, 총기사고, 지진에 관해 보도가 되던 때였다.)
누가 그랬던가, 세상에 ‘절대’란 없다고. 일주일 뒤, 멕시코로 결정이 났다.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늘 몸소 느끼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내뱉는다. ‘절대’란, 절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남편은 다시 제2의 송별회를 시작했고, 나는 다시 부동산과 중고차 매매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거짓말처럼 남편은 4월 1일 만우절 날, 멕시코로 떠났다. 남편이 떠나기 전까지 정말로 이번에는 가는 것이 맞는지 수없이 의심했지만, 이번은 ‘진짜’였다.
이렇게 나의 멕시코 생활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