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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조한 글쓰기 Nov 14. 2021

퇴사 전 마지막 프로젝트

마지막 불꽃을 태운 기억

나와서 보면 다른 것들이 보이는 게 있다. 바둑도 그렇고 시험도 그렇다. 그 자리에선 잘 못하지만 막상 밖에서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다. 아마 회사 생활도 그런 종류로 생각한다.


2016년 8월, 그렇게 6년간 다녔던 KT를 퇴사했다. 과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연차라 동기들 모두 예민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승진하지 못한 윗 선배들까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온다는 위기감이 높았다. 서로 돋보이려고 애를 썼고, 승진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려 노력했다.


당시 필자는 승진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누적된 성적도 별로였고, 조직 내 승진 환경도 불리했다. 다만 내가 PM으로 맡아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성과는 좋았다. 그 프로젝트도 사실 고생만 보이고, 빛이 나기 어려운 그런 소외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외부 업체와 계약을 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무조건 해야 하는 그런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누군가의 똥 치우는 일'이라 생각했다. 잘해도 성과로 인정되기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일을 맡았으니 과장 승진은 물 건너간 것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승진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힘들게 하는 일이 있었다.


조직 내에서 밀어주고 있는 소위 '빅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 프로젝트는 조직 내 최고 경영자가 직접 챙기며, 보고 자리도 따로 갖는 그런 태생이 다른 7가지 프로젝트였다. 조직 내 동기가 총 4명이 있었는데, 그중 필자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했다. 게다가 동기들 모두 프로젝트 진행 보고를 준비하는 동안, 필자는 프로젝트 발대식(?)에 필요한 케이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촛불을 붙이며 얼마나 스스로 창피하고,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 계륵과 같은 프로젝트를 떠맡은 게 억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왠지 오기도 생기고,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났다. 당시 프로젝트는 빅데이터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이 분야의 실무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직 내 빅데이터 전문가를 직접 팀에 섭외하고, 일정을 매우 타이트하게 잡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퇴근 후 빅데이터 실무를 공부했고, 4시간 단위로 업무 목표와 성과를 관리했다. 아마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대로 짜인 게임 판에서 이단아가 되고 싶었다.


사실 그때는 이미 엔씨소프트로의 이직이 확정된 후였다. 이런 상황을 아는 지인들은 그래서 더욱 의아해했다. 그러나 마지막 모습이 밀려서 나가는 모습으로 보이기 싫었다.


그렇게 조금씩 가시적 성과가 보이자 조직 내에서도 비중이 높아졌으며, 결국 사장님 보고까지 직접 진행할 수 있었다.


그 보고가 끝나고 퇴사했다. 누군가는 아깝지 않냐고 했지만, 오히려 후련한 마음이 컸다. 뭔가 마지막 불꽃을 깔끔하게 태우고 나온 느낌이었다. 그때의 보고서를 보면 나름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지금도 흐뭇하게 넘기면서 볼 수 있다.


이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요즘에는 회사에서 열심히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들 한다.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 계발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후회 없이 해보고 끝냈을 때, 스스로도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퇴사 전 미친듯한 야근과 보고에 정신이 없었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불리해도, 충분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주변에서 알아준다는 것을 배웠다.


꼰대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필자에게 있는 것은 시간과 정성뿐이었다. 소위 기적과도 같은 성과의 시작에는 시간과 정성의 무모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커리어파일을 정리하다 문득 들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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