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
중국을 떠날때는 내가 다시 그곳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인가로 부터 도망치듯 떠나야만 그곳은 한때 내 삼십대와 사십대 초반을 불태웠던 곳이고, 가족들과 미래를 꿈꾸었던 보금자리였다. 지금도 가끔은 그냥 그때 힘들었더라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늘 내가 살고자 한 곳은 아내가 머물기를 싫어했고 아내가 머물고자 한 곳은 내가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중국행은 처음에는 모처럼 한번 같이 살아보기로 의기투합해서 갔던 곳이다. 미래가 암담하기만 했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에서라면 아내랑 새롭게 시작해 볼수도 있을 것 같아 회사에서 오라고 할때 앞뒤 가리지 않고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넘어 갔었다. 돌이켜보면 서툴기만 했던 어리석은 남편이었고 아이들의 어린 아버지였다. 10년의 중국 생활을 실수투성이로 살았다.
한국에 새정부가 막 시작이 되고 한국의 사드배치로 인해서 한창 중국이 대놓고 한국을 마구 심한 소리를 하던 그때 내가 떠나왔던 그곳 중국 청도에 다시 출장을 가게 되었다. 호텔의 중국 TV에는 계속 한국에서 미사일을 쏘는 뉴스가 계속 나오고 나를 쳐다보는 듯한 중국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거리를 돌아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웠지만,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을 다시 가게 되었다는 것, 적당히 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예전의 기억을 더듬기에 충분한 거리를 나를 흥분하게 했다. 아이들이 무척 자그만 했었고 서로에게 서툴기만 했던 젊고 어렸던 엄마와 아빠. 그때 사진 속의 나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했던지 항상 인상을 짓고 있다. 지금이라고 하루하루 사는게 별반 나아진 것도 없지만 그때는 참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때 좀 노련하게 가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서로에게 좀더 관심을 가지고 관대하게 대했더라면 지금의 내 삶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인데. 여전히 매캐한 중국냄새가 나는 거리를 걸으며 입안에 는 씁쓸한 침이 고인다.
2002년부터 10여년간의 중국생활은 우리 가족에게 무엇이었을까.. 지금 내 삶은 그때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과오와 실수에 대한 결말일까. 내가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와 다르게 살수 있을까. 사진 속의 찌푸린 내모습을 펴질 수 있게 만들면 그 이후의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삶은 더 좋아졌을까..
안녕하세요. 여러분 문화해설사 강연수 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있는 곳은 미스터 션샤인의 주요 무대였던 조선의 개항을 상징하는 정동길 입니다.
표지의 서울역사 박물관에서 내려받은 ‘개화백경’이라는 사진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찍혀진 사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좌판 위에는 안경집, 숟가락, 잘 보이지 않아서 분간은 안되지만, 뭔가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상품들이 가득합니다. 아마도 이곳 근처 어딘가 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사진에 담겨진 분들은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인 것 같습니다. 사진기를 제대로 응시하고 있고 선글라스 끼고 제법 멋을 내고 찍히셨네요. 여러분이 만약 막 개항이 되었던 시기에, 외국 물건들이 조선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에 살았다면 어떤 것을 팔아보고 싶어세요? 그때 조선인들에게 가장 좋아했던 외국 물건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지금까지 해오던 사업관계로 중국과 일본에 가서 잠깐 씩 살기도 했었고, 두나라 사람들과 비즈니스 상의 친구를 맺기도 하고 지금도 가끔씩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두나라를 자주 방문하게 되면서 우리랑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알고보면 엄청 다른 두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교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역사 중에 한가지가 바로 서세동점의 시기에 이 세 나라가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개항을 맞이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서양문명의 도전에 대해서 어떤식으로 응전을 했느냐가 이 세나라의 향후 역사를 어떻게 바뀌어 놓았는가 하는 것은 잘알고 계실 것입니다. 동방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라는 자부하던 중국은 나라가 망하고 수십년동안 내전 상태로 빠져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생명을 잃었습니다. 아시아의 제일 끝에 위치했던 섬나라 일본은 상황판단을 가장 빠르고 정확히 했고 우왕좌왕하던 두나라와는 달리, 국가전체가 일사분란하게 근대화, 서양화로 나아가서 동양에서 가장 빨리 선진화를 이룩합니다.
한국, 당시의 조선은, 500년동안 나라의 통치 시스템으로 삼았던 성리학이란 시스템 (원조인 중국에서조차 오래전에 용도폐기된) 에서 끝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립니다. 건국초기에는 잘 작동하던 시스템이었지만 500여년에 걸친 사회의 발전과 주위 환경의 변화를 쫓아가기에는 너머 낡아버린 상태였지만, 단단해져버린 성리학의 틀을 벗어버리는 일은 나라를 잃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의 근대는 늘 일본의 식민지라는 단어와 함께 할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큰 갈림길에서 보여준 우리 조상들의 모습들이 오늘날 이 시국에 우리 사회에 그대로 오마주되어 보이는 것은 저만의 착각은 아니겠지요.
경운궁(덕수궁) 돌담길 뒷길에는 조선의 개화 일번지인 정동길이 있습니다. 정동은 조선초에 태조 이성계의 경처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릉과 흥천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태종이 릉을 지금의 정릉동 옮겨버렸고 흥천사는 연산군때 큰 불이 나서 전소되었습니다. 정동에는 성종임금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거처할 곳이 마땅히 없던 선조가 현재 경운궁(덕수궁) 터에 있었던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정하고 거처를 합니다. 선조는 결국 이 행궁에서 죽을때까지 지냅니다.
지금도 정동길에는 정동 제일 교회와 정동극장, 원명원, 이화학당/배재학당, 미대사관저 등은 예전의 그 모습을 유지한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개방에 관한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후 많은 나라들과 조약을 맺는데 그들의 공사관 자리를 주로 경운궁 주위의 터나 경운궁의 부지를 내어줍니다. 지금은 망루만 남아있는 러시아 공사관도 경운궁의 뒷편에 있어서 을미사변 후 고종의 아관파천이 가능했었습니다. 정동길에는 개화기 때 서울 사람들이 느꼈을 흥분과 감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정동은 서양 여러나라의 공사관과 종교시설이 집중 되면서 공사관 길로 서양인들의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정동에는 초기의 중요한 외국인들이 대부분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의 조선과 대한제국에 대한 소개가 정동지역에 기반을 둔 묘사가 많았다고 합니다. 외국에 조선을 알리는 책자나 소식지에 주로 정동의 사진이나 그림이 많이 실렸다고 합니다
정동에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 독일인 고문관 묄렌도르프 등 각 나라들의 공사 및 외교관들, 그들의 가족들과 알렌,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같은 의사와 선교사들이 거주를 했습니다.
알렌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보다 조금 먼저 들어와서 의료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외과의사였던 알렌은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칼에 맞아 큰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를 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민비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병원의 부지를 요청한 알렌을 부탁으로 고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처형당한 홍영식의 집터에 병원과 학교를 설립을 허락합니다. 당시 홍영식의 현재 헌법재판소 터 였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은 광혜원이 설립이 됩니다. 광혜원은 곧 제중원으로 이름이 변하게 되고 아직 선교가 합법적이지 않았던 시기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제중원의 교사신분으로 입국을 합니다.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던 알렌이 미국 공사관의 일로 바빠지며 제중원의 경영이 부실해 지자 새로 부임한 에비슨은 조선과의 협상끝에 제중원에 공식적인 선교부의 설치 허가를 받으며 제중원은 사립 선교 기관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미국 장로교 소속이 된 제중원은 이후 미국의 부호였던 세브란스에게 거액의 기부를 받으며 스스로 성장을 하게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자 교육기관이었던 제중원은 이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됩니다. 이때 세브란스 병원과 의료 교육기관의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언더우드였고 이후 언더우드가 설립했던 경신학당의 대학부와 세브란스 병원을 합쳐져서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인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됩니다. 연희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이 언더우드였습니다.
언더우드와 같이 조선에 왔던 미국 감리교 목사, 아펜젤러도 선교와 학교 사업을 함께 진행하는데 정동에는 그가 세웠던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온 메리 스크랜턴은 여성을 위한 첫번째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우는데 그 위치 역시 정동제일교회 바로 옆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교육과 기독교(개신교)의 시작과 발전은 이들 선교사의 헌신에서 기인을 하고 발판이 되었던 터가 정동이었습니다.
정동극장 뒷켠에는 중명원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중명원은 원래는 덕수궁의 일원이었는데 궁이 잘려 나가는 바람에 지금은 덕수궁 영역의 바깥에 있습니다. 덕수궁에 1904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고 나서 새로 개축을 하기전까지 고종황제는 중명원에서 지내십니다. 중명원은 서양식 벽돌건물이라 대화재때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을사늑약에 진행된 장소로 유명합니다. 개항 이후에 조선은 근대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문명을 가져다 온 근본적인 변화를 알지 못하고 기존에 하던 것을 밑바탕에 깔고 겉핥기 식 흉내를 내면 근대화가 되는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조선의 개항과 개화의 사상을 주로 동도서기, 구본신참이라는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반면에 일본의 개화는 탈아입구로 표현을 합니다. 조선은 서양/개항에 대한 해석을 동쪽의 도, 근본은 그대로 두고, 서쪽의 기술, 물질적인 것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양으로 가야만 살수 있다. 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서양을 배우려고 보냈던 사절단과 유학생의 숫자에서 크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일본의 본격적인 개방이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는 메이지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 서양을 다녀온 유학생과 사절단은 이미 400여명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과 중국은 전무하다 시피 했고, 메이지 정부 수립 후 공식적인 사절단인 이와쿠라 사절단은 최고위급 관료와 엘리트들이 2년간을 세계 여행을 합니다. 이에 반해 조선은 미국과 수교 후에 조선이 미국으로 보낸 첫 보빙사 일행은 10명 남짓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결국 한나라는 제국으로 성장하고 다른 한나라는 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을 했습니다.
이런면에서 구한말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과 지금의 우리는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행이던 사업이던 유학이던, 한국인들은 매년 어마어마한 인원들이 해외를 돌아다닙니다. 코로나 발생 전년도인 2019년의 한국인 출국자는 2890만명으로 전 인구의 절반이상이 해외로 나간 것으로 집계가 되고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년간 800만명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해외로 나가는 것에 흥미를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90년대초에 버블이 깨진후로 일본인들의 해외여행은 1600만명 수준에 20년째 머물고 있고,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의 숫자도 200만명을 넘지 못합니다. 인구숫자를 생각하면 한국에 비해서 해외로 나가는 일본인의 숫자는 저성장 경제 상황에 감안하더라도 많이 못미칩니다.
언제까지 한국인들이 열심히 해외로 나가고 해외의 유명 관광지 마다 한국어를 듣는게 아무렇지 않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이러한 모습들이 분명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합니다. 그 어떤 것이 우리를 변화시켰을까요? 전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가 같은 민족의 나라 북한이라고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성이 원래부터 개방적이었을 것 같지도 않고, 식민지의 아픔과 교육이 정신을 개조 시킨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려때나 통일신라 시대에는 해외 여러나라들과 교류를 지속적을 했던 개방적인 사회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민족성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한말 조선의 실패와 식민지 그리고 조국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우리가 배운 것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내가 지금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어쩌면 나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고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의문은 늘 제기해야 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자료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표지사진 & 구한말 정동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