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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연수 Jan 26. 2022

걷기 in 서울 8

낙선재

포항 아내의 집에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 아파트 건물과 건물 사이의 조경이 가볍게 날카로운 햇살과 함께 눈안으로 들어왔었다.  키 큰 소나무 한구루랑 건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텅빈 하늘..  나는 그 공간이 참 좋았다.  아내랑은 앞으로 얼마나 더 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잘모르겠지만, 포항 아내의 집을 떠나면서 가장 아쉬웠던게 방안에 누워서 쳐다보던 하늘 그리고 소나무가 보이던 그 공간과 방안의 책들과의 이별이었다.   아주 멋진 유배지 같았던 그곳에서는 삶이 참 달작지는 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냉이된장국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곳에 다시 돌아갈 수나 있는지 가는 법조차 잃어버렸다.


높은 집의 꼭대기에서 쳐다보는 세상과 낮은 집의 마루에 앉아서 쳐다보는 바깥 세상의 차이를 생각한 적이 있다.  높은 집에서는 바깥 세상이 작게 보인다. 내가 무척 거대한 사람이고 나를 둘러싼 세상은 작게 느껴진다.  손을 뻗치면 웬만한 건물이나 풍경들은 움켜쥘 수 있을 것 같고, 발로 밟으면 쉽게 부서질 것처럼 세상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낮은 세상의 나는 올려다 보기를 싫어한다.  그냥 세상의 높이가 딱 내 눈높이 만큼만 존재했으면 좋겠다.  올려다 보기도 싫고, 그렇다고 내려다 보려면 꼭 허리를 숙여 쭈그리고 앉게 되어서 이 자세도 힘들다.  그냥 내 키만큼만의 세상을 흘러가는 강물 쳐다보듯이 살고 싶어진다.


한옥의 맛은 낮은 세상 속에 사는 나와 가깝다.  누마루의 창틀에 기대어 앉거나 대청마루에 누워서 바깥을 내다보는 맛이 일품이다.   올려다 볼것도 없고, 내려다 볼것도 없다.  그냥 적당히 고개를 들어 바깥을 내다보면 바깥 세상의 서있는 키가 앉아 있는 내 키와 거의 맞는다.  시선이 마당에서 건넌방으로, 다시 건넌방 옆의 빈 공간으로 그리고 그 지붕위의 나무들.  집안 사정이 궁금한듯 집쪽으로 굽어져 나무들 위로는 파란하늘.  시선이 땅에서 하늘로 로 아무런 거침이 없이 물 흐르듯 가볍게 나아간다.


옆으로 길게 건물이 들어서 있는 창덕궁의 여러 영역을 지나서 마지막 영역인 낙선재 공간에 들어오자 해설선생님은 숨을 고른다.   창덕궁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낙선재다.  


가을날 낙선재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통틀어 낙선재라고 합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방이었습니다.  낙선재라는 이름은 영조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나 1756(영조 32)과 1788(정조 12)년에 발생한 화재로 타버려서 [동궐도]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낙선재는 1847(헌종 13)년에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왕실의 사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것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에는 고종이 이 곳을 집무실로 사용했고, 고종은 여기에서 대신들을 만나 갑신정변의 뒷머리를 하고, 일본과 청나라 등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기도 했습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1874 ~ 1926년)은 국권을 빼앗기고 나서 1912년 6월 14일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겨 거주하였습니다.  1963년 일본에서 환국한 영친왕 이은(1897 ~ 1970년)도 낙선재에서 생애를 마쳤으며,  그 후 이은의 부인 이방자(1901 ~ 1989년) 여사가 여기에서 살았습니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 팔작지붕집으로, 오른쪽 한 칸을 전면으로 돌출시켜 누마루로 삼았습니다. 이 일대는 본래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영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건물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보시다시피 낙선재는 창덕궁의 다른 건물들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단청이 없다는 것이 특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물론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는 궁궐의 다른 목조 건물들처럼 지면위로 지반을 높게 다지고 기단을 깔았습니다. 기단석은 장대석을 삼단으로 쌓았는데 처음 시작하는 단의 높이를 조절해서 땅의 기울기를 맞도록 건물을 놓았습니다.  기단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계단을 깔았습니다.  계단과 기단에서 알수 있듯이 지면에서 제법 높게 집을 올려서 기단 위의 사람이 아래의 사람에 비해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도록 설계 되었습니다.   건물에서 높이가 주는 것은 대부분 권력이나 권위에 상관이 있습니다.  기단위의 덥개돌은 전돌을 깔았습니다.   

지금까지 궁궐의 다른 건물들 보시고와서 바로 느껴지시겠지만 주춧돌과 기단석의 가공이 이전의 다른 건물의 석재에 비교했을 때 더 정교하게 작업이 되어 있습니다.  석재의 모서리 부분 잘라내기,  소위 모따기를 정성스럽게 해 두었습니다.

여러차례 개보수를 거치면서 근래에 새롭게 사용한 자재도 있겠지만, 헌종임금님이 이 집을 지으시던 시기는 이미 자재를 가공하는 기술이 상당수준 근대화 되어서 이전과는 달리 정교하고 고급스런 이미지를 줍니다.  

사각으로 반듯이 가공된 주춧돌 위로 다시 사각의 기둥이 단아하게 올라갔습니다.   기둥위의 보와 도리의 연결되는 공포(주두, 柱頭, 혹은 두공)는 익공식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옥과 같은 목조건물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는 공포는 주심포, 다포, 익공식 구조로 나뉘어 집니다.  화려한 공포인 다포식은 궁궐 건물중에도 근정전이나 인정전처럼 행사를 치루는 큰 건물이나 사정전이나 선정전처럼 임금이 신료들과 국가 통치를 행하는 치조영역의 건물에 주로 나타납니다.  궁궐에서 왕실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연조의 건물들은 대부분 익공식 건물들이 많습니다.  왕실 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들의 집들도 익공식 공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장식의 화려함 보다는 담백한 고졸미를 즐길줄 알던 조선시대의 양반들에게 선택된 것이 익공식입니다.

낙선재 역시 익공식을 따르고 있고 기둥위에 들보가 있고 들보가 지붕을 받치고 있습니다.  한옥 처마는 한겹을 더 바깥으로 내는 겹처마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한옥건축양식입니다.

낙선재 관람은 여러가지 포인트들이 있기는 한데 건축과 장식미라는 측면에서 관람을 하시는 재미있는 점이 많습니다.

낙선재가 특이하게 보이는 점은 몇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선 창살장식을 한종류가 아닌 여러가지 종류를 가져와서 각각의 부속건물의 창살 장식을 보여주는 재미가 있고,  문의 형태 역시 둥근문과 전형적인 사각문을 같이 사용을 해서 일반적인 건물과의 차별을 두었습니다.   

낙선재는 단청을 칠하지 않는 궁궐속의 건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건물과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궁궐 건물은 모두 울긋불긋 단청이 칠해져 있는데 낙선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덕궁의 후원에 가면은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그의 아버지는 순조를 위해 지었다는 연경당 역시 이와 같이 단청이 없습니다.  동궐도에는 벽이 붉게 칠해져 있지만 현재 집을 보아서는 단청을 칠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헌종임금은 어릴때 아버지를 여윈 자신의 아버지가 지었다는 연경당에서 낙선재의 설계 모티브를 받은 것 같습니다.  궁궐안의 사대부식 살림집이라는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자 이제 자유롭게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찬찬히 한번 보시고 사진도 많이 찍으시기 바랍니다.  20분정도 보시고 지금 이자리에 다시 오시면 나머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전 경주에서 문화재 공부할 때 불교의 전래가 변화시킨 신라시대의 매장문화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도 가끔씩 발표가 되는 신라의 무덤 발굴시에 엄청나게 쏟아지는 매장품들은 대부분 불교전래 이전의 무덤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때까지 신라 시대의 왕이나 왕족들의 무덤은 그가 죽고 나서도 살아생전의 권세와 부귀를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에서 그가 사용하던 장신구나 재산을 무덤에 넣어서 매장을 하고 그 매장품들의 도굴을 막기 위해서 관과 매장품 위로 엄청난 규모의 바위와 돌들을 쌓아올리는 식으로 봉분을 지었지만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사람들이 죽어서 그 매장품들을 저승으로 가져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일반화 되면서 이런 풍습은 점차 없어져 버렸다.  물론 그 매장품들에 쏟던 정력과 비용은 살아있는 후손들 차지가 되었다.  주인이 죽으면 노비들과 말까지 같이 죽여 순장을 하던 풍습도 이런 시대적 변화와 함께 없어졌다.  


조선은 성리학의 사회였다.  조선 후기는 성리학 중에서도 예학의 연구와 실천이 중요한 시대적인 이슈가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학문연구와 정신적 수행에 집중하는 심학,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주자가 정해놓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극한으로 추구하던 이 사회에서 실학이 유행했다는 말은 좀 생뚱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유행했다는 실학이 일제와 서양세력의 도전에 무기력하기만 했던 조선후기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한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으니 말이다.  아마 내재적인 발전으로 조선이 근대화할 수 있었을 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고개가 갸웃거린다.


단청으로 울긋불긋한 여러 궁궐의 건물들을 지나쳐서 낙선재 앞 감나무 옆에 서면 조선후기 실학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일제 식민지가 없었고 서양문명에 동아시아 문명이 완전히 패배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우리 근대화의 모습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왕을 비롯한 그 시대의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그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지고, 크고 형식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작고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드디어 찾을 줄 알게 되었다.  작은 공간에 창살 장식하나, 문 모양 하나, 추상화같은 방열판장식, 무엇보다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자연색 그대로의 나무 기둥..  여기서 드디어 아름다움 찾았고.  진짜 조선적인 아름다움,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중국도자에 비해 확실한 차이를 보여주었던 조선백자의 고졸미가 완성되던 그 시대를 낙선재는 대표한다.  

만약 조선이 나라를 잃지 않았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분명히 낙선재 같았으리라..


바람 좋은 봄날 낙선재 앞에 서면 이 건물을 지을때 이곳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할머니와 같이 오래 오래 살고자 했던 어린 왕의 작은 소망이 세월과 질병 앞에 쓰러져간 역사의 이야기가 들려오며 쓴 웃음이 난다.

볕이 좋은 가을날 낙선재 앞에 서면 이 건물에서 마지막을 함께 했던 마지막 조선의 모습이 애잔함과 쓸쓸함이 눈속으로 투영되어 들어온다.   

낙선재는 앞에만 서면 이 건물은 내 귀속에 입을 대고, 니가 사는 이 세상이 니 한몸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버거울 수도 있고, 내심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살라고, 할수 있을만큼 살아보라고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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