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옥진 Mar 27. 2023

그렇게 나의 아이가 스쳐 지나갔다.


3만 번 생각했다. 과연 내가 둘째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의 경제력이, 남편의 경제력이 두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는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론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였다. 경제적 여건은 차선이었다. 결국 나의 마음속에는 언젠가 이 집을 반짝반짝 빛내줄 둘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나의 아이는 이제 기저귀도 필요 없고 이유식도 분유도 필요 없다. 여차하면 어른 숟가락으로 밥을 먹여도 되고, 아이에게 숟가락을 쥐어주면 알아서 먹을 줄도 안다. 화장실도 가리고 큰 볼일인지 작은 볼일인지도 구분할 수 있다. 아직 몸이 작아 변기에 앉는 것은 도움이 필요하지만 큰 볼일 보는 게 창피하니 나가라고 말할 줄 알 정도로 컸다. 이제는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여벌의 옷 한 벌과 속옷 양말 세트 정도 들고 다니는 것 이상은 필요가 없다. 그것도 작은 파우치 하나면 충분하다. 아이가 이만큼 클 때까지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살만해지니 둘째를 생각하는 평범한 단계였다. 


하지만 그 아이를 낳을 나는 평범하지 않다. 37세에 결혼을 했고 마흔에 첫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44세이다. 무엇을 새로 시작해도 놀랍지 않은 나이라 생각하지만 그게 임신과 출산과 육아면 좀 다른 문제다. 물리적으로, 의학적으로 노산인 건 이미 확정이요 이제 5~6년이 지나면 폐경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 나이이다. 내가 억대 연봉이라 마사지로 추스르고 시터 두 명에 살림 봐주는 이모님까지 모실 경제적 능력이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평범한 주머니사정에 마흔 중반의 여성이다. 지금 둘째라니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아이를 갖고 싶다와 뒷감당이 힘드니 안된다 사이에 쐐기를 박은건 큰아이였다. 언제 어떻게 물어도 아가동생은 싫다며 맹렬히 도리질하던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아가동생을 갖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첫 해외여행에서 뭘 보고 느낀 건지, 여행을 다녀온 이후의 급작스러운 태세전환에 모두가 놀라고 있는 상황이다. 아이가 원하지 않아요는 핑계였다. 내 마음은 경계선에 서 있었다. 내 인생에 내 배 아파 낳는 아이는 더 이상 없다고 선언했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작은 아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 첫째의 '싫어요'는 일종의 방어선이었다. 아이가 싫으니 안 돼. 그런데 그런 아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하니 희한하게 나의 마음도 같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이를 갖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저 평범하게 인진쑥환을 사고 옷을 따뜻하게 입고 날짜를 계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생리 예정일이 다가오는데 몸이 평소와 확연히 다른 게 느껴졌다. 이건 분명 새로운 생명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지난번 임신때와 명확하게 같은 증상들, 강도는 다를지언정 확연히 느껴지는 변화들. 나는 언제나 돼야 임신테스트기를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급기야 임신예정일 이전에도 쓸 수 있다는 테스트기를 사들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까지도 기다리지 못하고 새벽에 자다 일어나 확인을 하는데 정말 매직아이하듯이 흐린 눈으로 겨우 보일 듯 말듯한 선이 보이는 게 느껴졌다. 문자 그대로다. 느껴졌다. 테스트기를 쓰자마자 불에 덴 듯 시뻘게지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유쾌하지 않았다. 그게 얼리테스트기였다 해도 이렇게 흐릴 일이 아니었다. 가만 생각하니 신체적 변화 역시 그 정도가 달랐다. 아프다 싶을 정도였던 가슴통증은 좀 뻐근하다 정도였고 배 아래 여기저기가 아프긴 했지만 가끔 따끔 정도였다. 


테스트기 라인을 확인하고 나서도 기쁨의 환호를 하기에는 좋지 않은 증상이었다. 사실 라인이 있다고 보기에도 너무 흐린 수준이었다. 지난번의 단호박과는 차원이 다른. 결국 2일 차에 병원에 갔고 임신테스트기 라인이 매우 흐렸다는 말과 함께 진료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지난번에는 너무 선이 분명하니 피검사도 필요 없고 그냥 초음파를 보시죠 했는데, 이번엔 미묘한 표정과 함께 피검사로 넘어갔다. 검사결과 호르몬수치는 10.36. 5 앞뒷면 그냥 비임신이다 할 정도이고 수치상 저 정도면 임신이긴 한데, 저 호르몬 수치가 매일 2배씩 올라가면 정상임신, 그렇지 않으면 재검 필요한 상황이라 했다. 더블링이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하시면 자주 오셔서 피검사를 해도 되지만 일단 2주 후에 보시죠라는 의사의 표정이 개운하지 않다. 


불안한 마음은 눌러야 하지만 초진비까지 4만 원의 돈을 들이고 나니 이 짓을 매일 하러 올 수도 없다 싶었다. 결국 테스트기를 매일 사서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만약 수치가 정상적으로 올라가고 있다면 호르몬의 강도도 높아지고 있을 것이고, 그럼 임신테스트기의 선이 명확하게 진해질 것이다. 날짜가 갈수록 진해진 테스트기를 날짜별로 모아둔 사진을 여럿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선이 있네 정도선에서 멈춘 느낌. 선이 진해지지 않는 것 만으로 충분히 우울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병원에 다녀온 지 5일 차. 갑자기 가슴 통증이 사라졌다. 분명히 예상대로라면 더 아파지고 더 힘들어져야 하는데 몸이 힘들지 않다. 이건 결코 좋은 사인이 아니다. 


아프다는 건 아이가 건강하다는 뜻이다


임신 내내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바로 저 한마디였다. 내가 아프다고 느낀다는 건 아이가 어디선가 씩씩하게 쑥쑥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이의 존재감은 그런 거였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아이는 엄마를 끊임없이 아프게 만들면서 본인의 건강함을 과시한다. 피검사를 받고 온 그날도 오후에 메슥거리고 힘들어져서 반반차를 내고 일찍 들어왔어야 했다. 아이는 아주 작고 또 작은 순간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남기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통증이 사라졌다. 갑자기 몸이 평온해졌다는 것은 나의 아이가 더 이상 내 품에 없다는 뜻이다.


2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다시 병원에 달려갔다. 피검사 수치는 15분 후에 나오고 나는 그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차마 전화로 들을 수는 없었다. 


수치가... 6으로 나왔어요.. 아무래도...


2배는 고사하고 지금 시점에는 256배 이상으로 늘어나야 정상인데 하물며 기존 수치에서 반토막이 났다.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라고 뭔 할 말이 있겠는가. 생리 이후로 새롭게 사이클이 리셋되는 거냐 하나 딱 묻고 더 이상 묻지도 듣지도 않고 조용히 인사하고 나왔다. 수납을 하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이 정도 수치면 실질적으로는 수정이 됐는데 착상이 안된, 엄밀히는 임신도 아닌 그런 상태였다는 글들을 읽은 적이 있다. 아이가 왔는데 자리잡지 못했으니 차마 임신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울면서 걸어갔고 그 상태로 남편과 통화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했고 그래도 난 회사로 돌아와야 했다. 식당에 앉아 자리를 잡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고 울먹이며 간단하게 '안 됐다'라고 말했다. 테스트기가 흐린 게 어떤 의미인지, 호르몬 수치가 낮은 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 내 상태를 어떻게 지칭하는지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나에게 묻지도 표 내지도 않고 조용히 혼자 찾아보고 마음 졸였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 상태로 사무실에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휴가를 내고 집에 갔다. 들어가는 길에 한의원에 들러 보약도 짓고 남편 다리를 베고 누워 키득거리며 유튜브를 봤다. 병원에서 나와 딱 사무실로 올 때까지. 그때까지만 울고. 나는 다시 평상심을 되찾았다. 임신, 출산, 육아휴직, 복직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책까지 써낸 나다. 내가 마음이란 걸 먹었는데 여기서 포기하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마음을 먹으면 그게 언제든 끝을 보는 사람이다. 오래 걸려서 그렇지.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오고 딱 그날 저녁부터 다시 생리가 시작되었다. 


어렵게는 '화학적 유산'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늦은 생리'라고 하기도 한다 했다. 유산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너무 싫었고 난 그냥 늦은 생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 컨디션을 들은 가까운 지인이 이야기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고. 나보다 더 시간이 지나 맞이한 일이라 너무 힘들었고, 몸도 힘들었다고. 분명히 차원이 다른 통증이 올 거니까 진통제 센 거 단디 챙기고 느낌 온다 싶으면 바로 먹으라고. 뭐 착상도 안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들이 뭐 얼마나 그렇게 차이가 있겠어?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수정했다는 상태 하나만으로도 이 큰 인간의 몸을 바꾼 존재였다. 상실도 그리 쉽지 않았다. 허리와 아랫배가 아픈 보통의 생리통은 없었다. 배란통처럼 오른쪽왼쪽 골반쪽이 번갈아가면서 아팠다. 생리양이 평소보다 좀 많다 싶었는데 바로 빈혈기가 온다. 고개를 획 돌리니 순간 핑 돌더라. 아프다 싶으면 바로 반차내고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런 카드는 한번 정도는 써야 했다. 


생리가 시작된 날. 아무 이유 없이 앞뒤 아무 정황 없이 갑자기 아이가 날 끌어안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엄마 나 아가동생 싫어


쎄 했다. 아이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생각했는데 이 아이가 뭘 알았던 것일까? 테스트기도 코로나 검사기인 줄 아는 아이다. 그런데 아이가 사라진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의 나를 위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동생이 싫다는 아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않는다. 지인과의 대화에서 "아가들은 엄마 몸의 아가의 존재를 알아챈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쩌면 나의 아이도 그 순간을 느꼈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가 품에서 스쳐 지나가고 1개월 반이 지났고. 나의 몸은 꾸준히, 아주 꾸준히 아프다. 강도 높은 생리통의 주간이 지나가고도 바로 격한 감기가 찾아왔고, 처방받은 감기약은 항생제 포함해서 7알이나 되었다. 감기가 나을 때쯤 치통이 왔고 그게 또 치료로 나아질 때쯤 또다시 목이 퉁퉁 부어 병원에 가야 했다. 이번에도 역시 항생제까지 포함이었고 말이다. 뭐랄까. 짧은 순간이지만 존재감을 뿜어내던 아이가 사라지고 나의 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지는 느낌이다. 몸이 아프고 지치니 이미 내 곁에 있는 아이에게도 성실해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고. 서랍 정리하다 테스트기들을 날짜순으로 다시보니 이미 3번째에 선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냥 혼자 흐린눈으로 살았던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쩌면 행운이 찾아와 아이를 붙들어맬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으로 말이다. 


내 몸의 상태와 무관하게 나는 기존의 삶을 살아내야 했고, 그런 시간들이 다시 피로로 쌓여 체력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이제 손가락 5개를 촥펴서 나이를 이야기하는 나의 아기는 극단적으로 예쁘고 극단적으로 힘들다. 이래서 미운 5살이라고 하나 싶을 정도로 극과 극을 오간다. 이 정도면 둘째는 없이 사는 게 정신건강에 좋은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이는 놀자 하고, 집은 엉망이다. 치우면 쌓이고, 또 치우면 쌓이는 일상이 무한반복되고 있으니 그래도 좀 정리된 집안꼴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정이 온다. 그렇게 평정을 쌓으면 또 아이와 충돌하고 나는 멘탈이 나간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이 아이를 얼마나 평화롭게 품에 안았던가. 이 아이가 내 품에서 이렇게 화내고 우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운이었던가. 화내고 울고 떼쓸지언정 스쳐 지나가지 않아주었으면 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언젠가 다시 행운이 찾아와 품에 안게 되면 더 없이 감사하고, 그게 아니어도 지금 내 품에서 꼬물대고 있는 저 미운 5살을 잘 보듬어 안으며 살아가면 되는것 아닌가.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