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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쉬룸 Feb 26. 2024

의지와 독립

타인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니

요 며칠 부쩍 신경써야하는 일이 늘어났다. 만약 남자친구가 있더라면 그와 의논을 하며 해결해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의 일들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가족과 논의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엄마, 아빠, 언니 중 누구와 이것을 논의했을까? 딱히 대상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들 내 문제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그러면 나는 왜, 남자친구와는, 가족과도 의논하지 않는 것들을 얘기하고 싶다고 느꼈을까?

바로'의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내가 매우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살면서 마주치는 문제에서 종종 남성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느낀다. 주로 부동산과 엮인 문제에서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부동산 중개소를 다닐때 여성들은 보통 남성 한명과 물건을 자주 보러 다닌다. 그 대상은 '아빠 혹은 남자친구, 혹은 가족 중의 한명'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개업자들도 남성과 같이 다니는 여성에겐 조금 더 조심히 대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동물적인 감각인걸까? 아무래도 나보다 힘이 센 동물이라면, 알아서 약자의 위치에 서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혼자 사는 여자'는 부동산 중개소에서 가장 '쉽게' 다룰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닐까 보여진다. 

래서 나는 살면서, 여성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혹은 남성의 도움이 있으면 조금 쉽게 풀릴 일들이 있을 때, 옆에 남자친구가 있으면 이런 일들을 의논하긴 했다. 


그런데 문득 '이게 맞는 건가?'하는 생각이 올라온다. 내가 아닌 사람은 결국 타인이다.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로 각자가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가 있고, 현대인들은 본인의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것 만으로도 이미 과부하다. 9 to 6로 근무를 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도 자료를 만들고, 평일 야간에도 긴급이 발생하면 종종 근무를 하곤 한다.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각자가 1.5~2인분의 스트레스를 어깨에 이고지고 살아가는 상태에서, 타인의 고충을 들어주기 까지에는 이미 한계가 넘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과거의 연애들이 실패한 이유에는 '스트레스의 한계'도 들어있지 않을까?


가뜩이나 나 한몸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타인의 슬픔과 외로움을 돌볼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만남을 시작하면 나는 그의 짐을 같이 들어줄 수 없고, 그 역시 나의 짐을 같이 들어줄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의 우리는 각자 '한계'에 놓인 상황에서, 낭떠러지에서 한 발자국만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서로를 보듬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서로 포기를 해버리는 상황에 놓여져 있던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이러한 상황이 시간이 갈수록 더해질 것이라는 의견이다. 회사에서 진급을 할수록 내게 주어지는 challenge는 더욱 커질테다. 돈이 모일수록 투자를 해서 불려야 한다는 강박도 커지기에 투자처를 찾는 공부도 꾸준히 해야한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은 다들 똑똑해서 모두가 몰려가는 곳에서 돈을 벌기란 힘들다. 그리고 투자 이후에도 수익이 나올때까지는 '시간'이라는 강력한 도구가 필요하다. 이 '시간'을 견디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나 혼자만의 기다림이 되느냐'  vs '내게 딸린 식구들의 삶도 함께 기다림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것이냐.'

언제나 생각하지만 전자가 낫다. 타인의 삶을 담보로 투자를 한다는 것, 타인의 눈에 비친 내가 돈에 광기어린 사람으로 보이겠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쉽다고 했다. 

단지 문제는, 가장 큰 문제는, 그 '돈'을 가지는 과정이 힘겹고 힘든, 눈물나는 고난의 과정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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