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까지도 사랑하다
라틴어로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한글로 번역하면 운명애 정도가 되겠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운명의 굴레에서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운명을 받아 들여야 한다면 기꺼이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체는 영원회귀의 마지막에 아모르파티를 말하며 결론지었다.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삶을 긍정하고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극복하고 넘어서고자 노력해야 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 의해 욕망은 끝도 없고 만족할 줄 모르며 더 높은 것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욕망한다. 이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의 모습은 자기 과제가 분명하며 어떤 고통도 극복할 수 있는 자이다. 자신의 사명, 과제 스스로 답할 수 있는 긍정의 힘 등 모든 것을 자신이 필연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아모르파티다.
니체식 긍정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봐도 좋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주체적 삶때문이라고 말할수 있다. 고통스러움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사랑이 있는 삶과 안정된 직장, 큰 위험이 없는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와 고난 고통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힌다. 어쩔 수 없이 돌고 도는 인생이라면 그리고 그 고통이 필연적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 그 감내할 의지를 나는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니체도 운명애라는 말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의 중앙로역에서 일어났던 대구지하철화재참사 50대 남성이 휘발유에 불을 붙여 바닥에 던져 일어났다. 한 번에 큰 불길이 번지며 연기가 자욱해지고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희생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그 순간을 맞이했다.
정치권에서는 증오와 복수, 원한, 이념, 가치 등의 대립과 진영싸움으로 한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 안에는 꼴도 보기 싫은 배신자들, 원한들이 선명하다. 언젠간 힘이 생기면 복수해주고 싶고, 당장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혀주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증오와 복수, 원한이 생각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 이는 원한의 감정보다 사랑의 감정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에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필연적 사건을 사랑한다. 그로 인해 극복할 과제가 생기고, 그것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힘!! 우리는 그런 사랑의 힘이 필요하다.
필연으로 생긴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과 전쟁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타인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
장자의 아포리즘을 살펴보면 운명은 신이 내린 명령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적 필연성이다. 현재 나에게 어쩔 수 없는 비난과 고난, 원한 등이 생겨났다면, 우리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자. 그리고 극복하자. 영원회귀의 굴레 속에 우리는 다시 고난, 원한, 배신 등의 많은 악조건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자기 삶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위버멘쉬 즉 초인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라 믿는다.
죽음의 문턱까지 삶이 몰릴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내 삶을 긍정하고, 원한보다 이해를 아픔보다 잘살아줬으면 좋다는 긍정 메시지를 보내듯 우리의 필연적 삶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