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의 약재 유품, 공진단 이야기

아버님의 사향주머니

by 리아

벚꽃 피던 계절 섬진강에 간 적이 있다.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여느 지리산 자락 식당들이 다 그렇듯이 각종 약초와 나물 말린 것이 가득이었다. 그렇잖아도 집 간장이 필요한 때라 벽면에 진열된 간장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사장님, 저 간장 직접 담그신 거예요?”


“저희 어머니가 담그신 간장이에요. 돌아가신 지 10년 지났으니 최소 10년은 된 간장이네. 어머니가 저거 담그시고 돌아가셨으니까.”


가까이서 보니 뚜껑에 먼지가 앉았다. 제품으로 본다면야 비위생적인 상태라 할 수 있겠지만 유품으로 본다면 세월을 알려주는 귀한 먼지다. 간장이야 오래되었다고 상하는 건 아니니. 그 길로 사장님 어머니의 유품인 10년 넘은 간장을 샀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그렇게 된장, 고추장, 간장을 유품으로 남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들은 어떤 유품을 남기실까? 외할아버지는 뛰어난 서예가셨다고 한다 - 집 안에서 하는 말이니 자타공인인지 우리끼리 하는 말인지 알 길은 없다 - 그러고 보니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시곤 했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외할아버지의 그 좋은 글들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께서 벽지 붙일 때와 불 땔 때 꼼꼼하게 다 쓰셔서 지금은 흔적도 없다.


시아버지의 사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뒤늦게야 아버님의 처방전 묶음이 생각났다. 1963년부터 한약방을 하셨으니 만 47년의 기록이 그 처방전에 담겨 있을 건데! 그걸 좀 정리해야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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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처방전
아, 맞다! 아버님 처방전 어디 있지?


이미 때는 늦었다. 어머님이 다 태우셨단다. 어르신들은 고인이 된 분들의 생전 흔적은 다 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늦게나마 찾은 것이 한의원에 진열 중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처방전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다만 아버님이 쓰시던 약장을 문경에서 동탄까지 가지고 왔고 거기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아버님의 약장에 좋은 약재만 채워 넣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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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약장. 아버님 스승 때부터 쓰시던 100년 이상 된 약장이다.


2016년이었으니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6년이나 지난 때였다. 남편과 내가 위기의 40대에 진입하여 체력이 좋지 않을 때였는데 어머님이 뭔가를 꺼내오셨다.


“이거 너희들 먹어라.”


어머님이 주신 것은 보사향, 즉 사향주머니였다.


“아버지가 구해 놓으셨던 거다. 너희들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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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약재유품 - 사랑이 담긴 사향주머니(보사향)


사연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교롭게도 어머님과 아버님은 비슷한 시기에 암 진단을 받으셨다. 당신도 암 환자이면서 아버님은 어머님을 많이 측은해하셨다. 치료로 몸과 마음이 바쁘셨을 건데 와중에 아시는 약재상을 총동원을 하여 사향을 구하셨다보다. 당신이 드실 사향이 아니라 어머님이 드실 사향을 구하신 거다.


“나중에 재규한테 만들어 달라고 해. 꼭 자네 먹게나.”


그렇게 사향을 남기고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2010년 2월 2일이고 우리는 2016년에 사향을 받았으니 사실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다. 어머님은 차마 드시지 못하고 그 유품을 보관하고 있으셨던 것이다(어머님, 사향은 간장, 된장, 고추장이 아닌데요. 처방전은 왜 그리 빨리 불태우시고 사향은 왜 그리 오래 보관하셨나요). 그러다 아들 내외가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니 그제야 꺼내신 거다.


'사향노루 사(麝)'는 '사슴 록(鹿)'에 '쏠 사(射)'를 합친 글자이다. 사향노루의 수컷은 생식샘 근처에 달걀만 한 향 주머니를 달고 있는데 그 향이 어찌나 강한지 수 킬로미터까지 난다고 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암컷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 향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사향(麝香)이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향료로 쓰고 동양에서는 약재로 써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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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주머니 안에 있는 사향가루를 반죽하고 환으로 만든 후, 금박을 입히는 수작업을 해야 한다.


멀리까지 퍼지는 그 향의 기운이 꽉 막힌 것을 소통하여 뚫어주고 풀어주는 역할을 하여 사향은 기와 혈을 강력하게 돌게 하는 것은 물론 약성의 몸 안의 구석구석까지 전달한다. 사실 이렇게 방향성이 있는 약재는 방향성 자체에 약성이 있으므로 향이 날아가기 전에 쓰는 것이 좋다. 아무리 주머니 안에 있는 거라 해도 6년이나 지나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아내에게 주고 싶은 아버님의 마음과 자녀에게 주고 싶은 어머님의 마음이 더 큰 효능이지 않을까 싶었다.


사향을 많이 다뤄본 한의사 분께 의뢰를 하니 시간이 지났어도 찌르는 듯한 향으로 맛도 매우 강하고 좋은 품질이라며 말로만 듣던 전설의 히말라야 산지 사향인 거 같다고 한다. 동의보감 피셜로는 가루보다는 덩어리 지고 알갱이가 많은 것이 좋다고 한다. 또한 보통은 5-10분 잡털과 찌꺼기를 골라내야 하는데 실제로 저 보사향은 열었을 때 잡 찌꺼기가 거의 없었다. 사향 가루와 더불어 녹용, 당귀, 산수유로도 가루를 내어 꿀을 넣어 반죽을 한 후 환으로 만들어 금박을 씌우면 비로소 공진단이 탄생한다(정성이라는 이름의 막일이 따로 없다).


나의 살과 피로 생각하라는 예수님의 떡과 포도주처럼 아버님이 유품으로 만든 공진단을 온 가족이 함께 먹었다. 시간이 지난 사향이고 수입과정을 알 수 없으니 한의원 판매용으로는 안될 말이었고, 아버님의 호 석농(石農)을 따서 석농공진단이라 우리끼리 이름 붙이고 가족들과 친척들께 드렸다.


할머니 세대의 간장, 된장, 고추장처럼 먹는 것으로 먼저 가신 이를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아버님의 약장, 아버님의 처방전, 아버님의 사향주머니. 고인이 되어서도 많은 유품을 남기신 아버님.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심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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