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은 경계(남북한)를 넘을 수 있잖아요.
어느 날, 한의원에 축구선수가 등장했다.
2008년 9월의 어느 날. 키가 크고 얼굴은 주먹만 한 분이 한의원으로 내원했다.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활약하던 안영학 선수였다. 안영학 선수는 동탄에 살고 있었는데, 지나가다 우리 한의원 간판을 보고 우연히 들어온 것이다. 참고로 당시 한의원 로고는 디자인에 멋을 너무 낸 나머지 가독성은 매우 떨어졌다. 그런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니 신기하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 보다.
운동선수라면 우락부락한 인상일 거 같은데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선한 인상과 순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저녁을 같이 먹던 어느 날, 고기 몇 인분이 한 자리에서 증발하는 것을 보고 운동선수는 운동선수구나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소리 없이 강하게 고기들이 사라졌다.
2009년 12월까지 수원 삼성에서 활약하던 그는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예선에 ‘북한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북한 대표라는 그가 어떻게 한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그의 국적이 ‘북한’이 아니라 ‘조선적(朝鮮籍)’이라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안영학 선수를 알기 전까지 ‘조선적(朝鮮籍)’의 존재도 개념도 몰랐다. ‘조선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잠깐 시간여행을 하자.
사실상의 무국적, 조선적(朝鮮籍) 축구선수
광복 전 일본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을 게다. 1945년에 해방이 된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재일 조선인'의 국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조선 국적, 즉 조선적(朝鮮籍)을 발급받는다. 당시만 해도 '임시 국적'이었던 셈이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재일 조선인들은 ‘조선적’이라는 임시 국적, 아니 사실상의 무국적 상태로 생활한다. ‘임시로’ 그어진 휴전선이 2020년 현재까지도 존재하듯, 당시만 해도 그 임시 국적이 지금까지 존재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여러 개인적 이유로 해방 후에도 ‘재일(在日)’을 선택해야 했던 적지 않은 동포들이 지금도 ‘조선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안영학 선수도 그러한 재일동포 중 한 사람이다. ‘재일 조선인 3세’인 안영학 선수는 어릴 때부터 그저 축구가 좋았다고 한다. 월드컵 무대에서 뛰고 싶은 꿈을 품은 그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1. 한국 국적으로 바꾸거나,
2. 일본 국적으로 바꾸거나
3. 조선적(혹은 북한 국적으로)으로 북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200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예선전에 북한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아공에 다녀온 그가 뜻밖의 선물을 들고 한의원으로 왔다. 정대세 선수를 포함한 북한 국가대표들의 사인을 전부(!) 받아온 것이었다. 북한 국가대표들의 사인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그리고 뜻깊은 선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수원 삼성과의 계약이 끝나 한국을 떠나야 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출국 바로 전날 그는 본인이 입던 유니폼을 선물하고자 한의원을 찾아왔다. 선물에 담긴 그의 섬세함에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5년 4월 중순, 달라이 라마가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달라이 라마의 법회를 듣기 위해 도쿄로 갔다. 도쿄로 간 김에 요코하마로 가서 안영학 선수를 만났다. 그는 2010년 한국을 떠난 후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한국 정부는 조선적 보유자가 한국 방문 시 필요한 여행 증명서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적’이라는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한, 단순한 여행, 관광으로도 한국 입국은 힘든 상태였다.
“불편하지 않아요?”
불편하죠. 한국이 그립습니다. 그런데 축구를 통해 남북한 관계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일 거 같아요. 조선적을 가지고 북한 대표이면서 한국에서도 뛰었으니까요. 남북한 친선경기라든가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정치적 지식은 제가 별로 없지만, 공(축구공)은 (경계를)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엄격히 말하면 무국적자인 그가 국경을 넘어가는 일은 굉장히 번거롭고 어렵다. 조선, 일본, 한국 등의 여권 3개와 여행증명서, 재입국 허가서 등 챙겨야 할 서류가 많은 데다가 이러한 상황이 매우 낯설을 공항 관계자들의 눈초리를 감내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과 번거로움과 억울함을 모두 감내하고 그는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무국적자’, ‘경계인’인 그는 국경을 넘지 못하지만 ‘공’은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다는 그의 굳은 확신과 ‘공’만큼은 국경을 넘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그의 꿈 때문이다.
제스처를 섞어 가며 말한 그의 바람은 진심이 담긴 말이었기에 굉장히 뜨겁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축구선수로서 경계를 넘는 ‘공’을 이야기하는 그의 발언이 어떤 정치인보다도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아, 저 사람은 축구선수로서 저런 비전과 소명을 갖고 있구나.
78년 생으로 당시 38세였던 그는 현역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같은 팀에 67년 생(미우라 가즈요시) 선수가 있어서 힘이 된다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목표로 뛰고 있다고 하였다. 짧고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그에게 공진단을 선물했다. 운동선수들은 도핑검사 때문에 먹는 것에 매우 신중하다. 그래서 한약 복용보다는 공진단으로 체력 보강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공진단에 들어간 녹용이 러시아산 분골 녹용이라고 했더니 러시아 월드컵을 상징하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현역에 대한 열정과 통일에 대한 꿈을 꿨던 그. 비록 경계인이지만 ‘공’은 경계를 넘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 그의 꿈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나의 조선을 꿈꾸며 후학을 양성하는 안영학 선수의 축구교실은 그 어떤 단체보다도 통일에의 꿈을 앞당겨 줄 것이다. 조선의 아름다운 청년 안영학, 그의 경계를 넘는 소망을 응원하며, 그가 키울 유망주들의 경계를 넘는 공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경계를 넘는 둥근 공의 활약을 공진단으로 응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안영학 선수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 공교롭게도 시사IN에서 안영학 선수의 은퇴 기사를 읽게 되었다. 기사를 읽으며 공을 차던 소년 십 대 소년 안영학, 2002년 홍명보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25세의 안영학, 2010년 북한 대표로 남아공 예선에 출전한 32세의 안영학, 그리고 이제 은퇴 후 축구교실을 꿈꾸는 마흔의 안영학 선수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휘리릭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