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탈지언정 세속의 때는 타지 않는 장년이 있다. 바로 출판계의 독 짓는 장인, 일빛출판사의 이성우 사장님이다. '독자가 읽을 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내고 싶은 책'을 내는 사람. 저자에 대한 기대 수준이 매우 높고 성질이 정말 O떡 같아서 - 찰떡인지 개떡인지 나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겠다 - 저자 또는 번역가와 트러블이 많은 분이다. 매력 부자이긴 하나 기질과 성질이 연구대상감이고 만나면 에너지 빨릴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만나야 한다.
사장님이 왜 진품명품에???’
어느 날 우연히 <진품명품>에 사장님이 출연하신 것을 보게 되었다(2019년 8월 11일 1186회). 사장님이 저기 왜 나오신 거야? 알고 보니 사장님의 조부이신 독립운동가 이규채 선생님의 회고록을 의뢰품으로 출품하신 거였다. 회고록을 감정한 전문가는 "이 기록이 한 사람의 개인적 기록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라 그 행적을 돈으로 평가할 수 없다."며 감정가를 0원으로 산정했다. priceless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을 뵈러 출판사를 갈 때마다 책상 위엔 항상 사장님 할아버지의 사진과 기록이 있었다. 사장님은 서대문 근처에 사시는데 2009년의 어느 날 서대문 형무소를 거닐다가 할아버지의 수형 사진을 발견하셨단다. 책의 씨앗이 된 찰나이다! 책 안의 할아버지 사진과 책 너머 보이는 손자의 얼굴. 생업에 연연하지 않고 50대에도 열정과 사명으로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2009년 할아버지의 수형 사진을 발견한 10년 후인 2019년 8월 12일, 바로 그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규채 기억록>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독립운동가이자 문장가였던 할아버지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저자였다. 출판업을 하는 꼼꼼한 손자는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할아버지의 기록을 샅샅이 모아 10년 만에 책으로 엮어낸다.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으니 시공간의 공교로움이 마치 짜 맞춘 시나리오 같다.
2019년 <이규채 기억록>에 앞서 2015년에는 <중국사상사>를 내셨다. 이 책은 번역만 10년, 편집 2년 반이 걸린 책이다. 만리장성을 쌓으신 거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이런 책을 내는 근성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 '누가 읽든 나는 낸다'라는 슬로건이라도 갖고 계신가 보다. 이 책은 그 해 '출판사가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책을 내는 출판사 대표들이 뽑은 책이니 말 다 했다. 다들 아마 속으로 '독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중국사상사>, <이규채 기억록> 모두 책으로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린 책이며 900페이지 내외의 두꺼운 벽돌책이다. 나는 읽는 데 10년 걸릴 거 같다.
사장님께서 구조요청을 하신 때는 2015년 중국사상사를 낸 직후였다. 시쳇말로 영혼을 갈아 넣으며 출판을 하시니 출판 직후엔 몸을 푼 산모마냥 진이 다 빠진 상태가 되시는 거다. 까다로운 분께서 오죽하면 동탄까지 왕림하여 진맥을 보시고 한약을 의뢰하셨을까. 궁금했다. 이렇게 정력적인 분께는 어떤 처방이 내려질까?
직관적으로 와 닿는 처방, <음양쌍보탕(陰陽雙補湯)>이었다. 무슨 처방인지 남편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음이고 양이고 기고 혈이고 다 빠진 거다. 음과 양을 함께 보하는 <음양쌍보탕>은 흔히 아는 십전대보탕(인삼, 백출, 복령, 감초, 당귀, 작약, 천궁, 숙지황, 황기, 육계의 10가지 약재)에 4자(子)와 맥문동, 산사, 목향, 녹용이 들어간다. 4 자라 함은 복분자, 토사자, 구기자, 오미자이다. '자'가 들어가면 씨앗을 말하는데 씨앗의 엑기스는 몸을 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장님의 경우는 에너지 과잉이고 본인이 갖고 있는 엔진이 과열될 때까지 혹사하는 스타일이다. 진이 빠지고 열정에 휩싸여 burn out이 되고 쓰러질 때까지 일을 하는 것이다. 기질대로 살아야 하고 생긴 대로 살아야 하니 그러한 것을 바꾸기는 힘들고 그저 때가 되면 주유를 잘해주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기름이 떨어질 때는 스스로 인지하시고 sos를 치시긴 한다. 약값은 간혹 잊으신다. 그리고 또 달리신다. 다음번에는 총명탕을 달여 드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