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피부는 많은 이들의 로망이다. 하얗고 보들보들하고 잡티 없는 피부. 그런데 아기라고 다 이런 피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토피가 있는 아기는 아기만이 아니라 부모도 너무 고생이다. 피부질환은 한두 번의 한약으로 드라마틱한 개선을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환자와 의사 간의 믿음이 중요하다. 지금 쓰려는 케이스는 남편 친구의 아들 민섭이 이야기다. 서울에서 동탄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고 돌도 안된 아기에게 맛없는 한약 먹이느라 민섭이 엄마께서 고생이 많았다. 믿고 맡겨준 민섭이 엄마 아빠에게 고맙다.
민섭이가 우리 한의원에 온 건 7개월 무렵이었다. 잘생긴 얼굴인데 피부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민섭이에게는 <백호인삼탕>이 처방되었다. ‘백호인삼탕’은 ‘백호탕’에 ‘인삼’을 더한 것이다.
백호탕엔 딱 4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석고(石膏), 지모(知母), 감초(甘草), 갱미(粳米)가 그것인데 <백호탕>은 하얀 석고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석고는 새하얀 가루로 백호라는 별명에 어울리기도 하거니와 사방을 지킨다는 신(동 청룡, 서 백호, 북 현무, 남 주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석고는 광물 약재이다. 약재라 하면 소위 풀뿌리만 생각하게 되는데, 석고와 같은 광물도 약재로 쓰인다. 민섭이 약을 달이려고 약 보자기를 들여다보면 언제나 석고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석고를 약재로 쓸 때엔 이렇게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가루 약재는 씻으면 유실되니 그대로 보자기에 넣어 달여야 한다.
석고가 약재로 쓰이는 것에 놀랐지만 의외로 여러 곳에 두루 쓰이는 팔방미인이다. 분필, 파스텔, 시멘트에도 석고가 쓰이고 석고가 갖고 있는 접착성과 응고성으로 두부를 만들 때도 석고가 응고제로 쓰인다고 하니 가히 변신의 천재다.
석고팩을 해본 사람이라면 석고의 성질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얼굴에 석고팩을 하면 처음에는 피부가 서늘해지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후엔 석고가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얼굴이 조여진다. 열을 흡수하는 이러한 석고가 약재로서 백호탕에 쓰일 때엔 아토피 피부의 열을 제거하는 청열 작용을 한다. 불을 끄는 소방수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광물 약재인 석고에 이어 눈에 띄는 또 다른 약재는 '갱미'였다. 갱미는 멥쌀을 말하는데 쉽게 쌀로 이해하면 된다. 밥이 보약이라더니 진짜로 쌀이 약재로 쓰이는 케이스다. 한약재는 식물, 곡물, 광물, 동물 등에서 유래하는데 갱미는 곡물에 속하는 약재이다. 갱미를 넣어 달이면 신기하게도 단 맛이 우러나와 아기가 먹기에도 좋다. 그러고 보면 한약재는 우리 일상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차려주는 집밥처럼, 배를 문질러주는 엄마의 약손 같은 것이다.
민섭이 처방은 석고, 지모 같은 차가운 성질의 약재로 서늘한 청열 작용을 하는 동시에 인삼과 갱미와 같은 따듯한 성질의 약재를 더해 원기를 보했다. 7개월에 인연을 맺었던 민섭이는 처음에는 더디었으나 어느 순간 피부가 많이 진정되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민섭이 엄마와 아빠는 뽀얀 얼굴을 한 민섭이를 데리고 왔다.
'피부가 좋아졌는데 한의원은 어쩐 일이지?'
엄마 말로는 이제는 여느 아이처럼 면역력 개선을 위한 보약을 지으려고 왔다는 것이다. 치료 한약이 아닌 보약이라니! 민섭이가 이젠 보약을 먹을 만큼 좋아졌구나 싶어 내가 더 기뻐했던 거 같다. 그때부터 민섭이는 대표적인 아이 보약인 <귀룡탕>을 먹게 되었다. 백호에서 귀룡으로, 정말 용 됐다. 민섭아!
7개월 때 만난 민섭이는 올 해로 7살이다. 아이들 치료는 특히 부모님이 중요하다. 믿고 맡겨주신 민섭이 엄마 아빠께 다시 한번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