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논두렁에 앉아
저무는 들은 눈물겹다. 저물면서 빛나는 논은 눈부시고 저물면서 멀어진 산은 아득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저무는 논두렁에 앉아 저무는 들을 바라보는 일은 눈물겹다.
어쩌자고 생이 이모양일까. 어쩌자고 날은 이리 가물고 어쩌자고 봄이 다 지났나. 사과꽃도 지고 달갑잖은 감자꽃만 환한데 어쩌자고 나는 중년의 농부가 되어 저무는 들 한 가운데 서서 지는 해를 멀거니 보고 있나.
누구누구 탓이었으면 싶더라. 베지 못한 감자밭 풀은 아무개 탓이었으면 싶고 싹도 안나는 들깨밭은 가문 시절 탓이었으면 싶더라. 마흔이 넘도록 대책없는 생계도 내 탓은 아닌 듯 싶고 나이가 들수록 주책없는 그리움 따위 나 몰라라 하고 싶더라. 그러고 싶더랬는데
젠장. 날이 저문다. 아침에 지날 때는 빈 들이었는데 저물어 돌아가는 저녁, 모가 가득 심어져 있다. 모내기가 끝났으니 내일쯤 뜬모를 할 테지. 날은 자꾸 저무는데, 저물어 금방 어두워지는데, 저물면서 빛나는 들만 자꾸 눈물겨워서, 어쩔 수 없지, 가난한 이웃 더불어 저물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