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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 Dec 21. 2022

침대 밑 추운 겨울

침대 밑에서 발견한 우리의 모습

     침대 밑 공간에는 어릴 적 모습이 담긴 앨범이 쌓여있습니다. 그 수를 세어보니 얼추 3,600장은 되어 보입니다. 끝도 없이 앨범을 넘기다 앨범 위에 수북이 쌓인 먼지 때문인지 아니면 멈춰버린 잊고있던 반가운 순간 때문인지 목구멍이 칼칼해져 옵니다.


     겨울이 시작되는 이맘쯤이면, 초코 가루와 함께 데운 우유가 담긴 보온병을 아침마다 건네는 당신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맛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온종일 들고 다니며 아껴먹다 집에 돌아올 때에는 식은 우유가 응고되어 덩어리가 되어버리곤 했으니깐요. 큰 숨을 한번 내쉬고 앨범을 열어보니 우리의 모습이 가득합니다. 흘러간 과거를 붙잡아보려 해보지만 잡히는 건 응고된 먼지 덩어리뿐입니다.


     사진기 속 창 너머로 보였을 우리는 어찌 이리 투명하고 소중할까요. 당신의 눈빛도, 표정도, 큰 팔로 저의 작은 몸을 감싼 모습까지 너무나도 투명하여 시리기까지 합니다. 예전에는 네모난 정사각형 앨범이 크고 무거웠는데 지금은 왜 이리 가벼운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진 속 당신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많은 노래는 지금 어디로 갔나요? 작은 방을 떠난 노래들이 산으로 갔나요, 바다로 갔나요? 어디로 간지 모르겠다면 되도록 멀리 아주 멀리까지 날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롭게 비행하다 제가 외로워하거든 다시 돌아와 가장 아껴놓은 노래를 부르며 오래도록 곁에 머물러 주세요. 노래는 더 아름답거나 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사진 속 그때처럼 불러주세요. 꼭 그래야만 합니다.

     오늘은 새벽 일찍 눈이 떠져 하루를 조금 일찍 시작했습니다. 해가 짧아져 이 시간에는 아직 어둡습니다. 창을 열어 크게 숨을 들이 쉬면 찬 공기가 훅하고 콧속으로 기습하는 걸 보니 정말 겨울이 왔나 봅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계절이 어느새 바뀌어 버렸습니다. 잠에 들지 않았더라면 계절이 조금씩 바뀌는 순간을 볼 수 있었을까 싶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유난히 깜깜한 새벽하늘이 조금은 쓸쓸합니다.


     세수를 하고 본 거울 속 제 얼굴 주름이 사진 속 당신과 얼추 비슷해져 갑니다. 당신과 비슷해지려 잠들기 전 한 번 더 애써 크게 웃음 지은 덕분입니다. 요즘 자기 전에 웃어 보는 걸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꼭 크게 웃어 주름 짓고 잠들어야겠습니다. 자꾸 하다 보면 저도 당신처럼 멋진 주름을 가질 수 있겠지요.


     점심을 먹기 전 한강을 내달리고 왔습니다. 매번 똑같이 뛰는데 매번 똑같이 힘듭니다. 희뿌연 입김과 함께 거친 숨을 토해냅니다. 당신의 칭찬을 갈망했던 어렸던 그 모습으로 서 있다 이내 그냥 힘들어합니다. 알면 알수록 이해 못 할 것 투성인 이 세상에서 마음 놓고 힘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당신에게 퍽 고맙습니다.

     더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가버리는 건 당신과 함께 바다에서 모래성을 지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애써 지은 모래성이 반복되는 파도에 조금씩 무너져가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러니 파도가 닿지 않을 모래 위에 작은 방을 만들어 두겠습니다. 큰 모래성은 아니지만 무너지지 않는 작은 방엔 사진 속 그때처럼 따뜻한 온기로 가득 데워두겠습니다. 모든 걸 얼려버릴 만큼 추운 겨울이 오거든 작은 방에 들어와 잠시 몸을 녹이세요. 그럼 저는 당신을 위해 냄비에 우유를 끓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고요하고 긴 포옹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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