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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21. 2020

라디오에서 나오는 탱고를 듣고 베를린이 생각났어요

당당해지기 위해 춤을 배울 것, 그게 아니면 모든 순간을 즐길 것

점심을 먹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던 길,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날이다. 그 찰나를 바꾼 건 아마도 탱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음악을 듣는다. “오늘 소개해드릴 곡은 Piazzolla의 <Histoire Du Tango>입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니에게 말한다. “진짜 신기하네. 이걸 들으니까 베를린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라요.”

그러니까 5월의 어느 날, 나는 독일에 있었다.





늦은 밤의 “Nacht koncert”를 예매한 후 무작정 걸었다. 미술관을 지나 공원 입구에 닿았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과 함께 산뜻한 초록의 행렬이 시작됐다. 거기에는 배드민턴에 빠진 젊은 남녀가, 엄마 품에 안긴 아이들이,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이 있었다. 오빠에게 물었다. 함부르크의 유학 생활은 어떤지, 또 많은 것들이 그립진 않은지.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 해를 보내고 났더니 이젠 괜찮아졌다고.


이른 저녁 무렵, 근처에 있는 유명한 케밥집으로 향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이야기 꽃을 피우던 중,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독일에 도착한 날 홀로 베를린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가이드가 되어주신 인도 할아버지였다. 독일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케밥집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인사를 나누고 오빠에게 할아버지를 소개했다. “유학생은 난데, 베를린에서 너의 지인을 만나다니.” 작은 종이 한 장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할아버지네 집 주소였다. 그는 내가 독일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며 밝게 웃으셨다. “Tchüss(감사합니다). See you later!“

연주 시간이 가까워져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독일에서 보는 첫 연주라는 사실에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홀 안의 광경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한쪽에는 정장을 입은 공연 관계자들이, 다른 한쪽에는 화려한 차림의 관객들이 와인을 들고 걸어 다녔다. 배낭을 메고 여행하던 내게 연주회에 어울릴 만한 구두나 눈부신 드레스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었다. 함부르크에서 유학 중이던 그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또 있었다. 그들이 곧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춤을 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 것. 몸치인 나는 두려운 마음에 한 걸음 물러났다. 우리는 입을 반만 열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집으로 돌아갈까? 설마 무대에서 다 같이 춤추는 거 아니야?”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었지만, 누가 한국어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속삭이며 맨 뒷 줄에 섰다.


밤 열한 시. 오빠와 나는 얼마든지 문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정해진 좌석에 앉자 연주자들이 무대로 나왔다. 그들의 연주를 보고 안도했다. 애초에 겁 먹을 필요도 없었는데. 그렇게 음악회의 반이 지나는 동안, 아름다움 속에서 잊지 못할 강렬한 음악을 만났다. 우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던  같다. 너무 익숙했던 탱고는 완전히 낯선 모습으로 나를 뒤흔들었다. 어쩌면 춤을 추는 것도 좋을 뻔했다. 무대가 막을 내린 뒤, 호스텔로 돌아가 음반을 찾아 들었다. 한 곡을 몇 번이나 반복 재생시키며 황홀한 여운을 누렸던 그 밤, 우리가 보냈던 독일의 봄이 탱고와 함께 마음을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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