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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20.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면

우리는 비로소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전염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강을 만들었다. 배가 있어도 노를 저을 수 없고 선착장에 닿을 수도 없다. 저마다 경계선을 만들고 고개를 돌렸으니. 단절은 큰 파도를 일게 했다. 따뜻한 말과 웃음소리는 심연으로 휘말려 갔고. 우리는 언제쯤 다른 마을에 도착할  있을까.  겨울이 막을 내리고 꽃이  텐데, 어디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있을까. 겨울에게 묻는다. 어떻게 이 계절을 마음에 담아야 하냐고.

늦은 밤,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에 고요가 깨진다. 그는 잘 지낸다고 말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로 간극을 메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말을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나는 책 한 권과 엽서를 품에 안은 채 전주로 향했다. 곧 반가운 재회가 시작될 테다. 중인동에 도착한 오후. 청명한 하늘 아래 기분 좋은 산책길이 이어진다. 골목에는 작고 오래된 미용실이, 그 길의 끝에는 소중한 안식처가 있다. 울창한 대나무 숲과 고양이 무리를 지나쳐 사랑스러운 정원에 닿는다. 낡은 벽난로, 유리병에 담긴 프리지아, 넓은 창 너머의 초록빛 풍경, 벽에 붙은 그림들, 알록달록한 담요와 흔들의자, 편안한 차림으로 인사를 건네는 수연. 집안 구석구석 호스트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음악 들으면서 편하게 쉬고 있어.”

두 사람이 소파에 기대어 각자의 삶을 나눈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뭇잎이 몸을 느슨하게 만든다. 곧 안락한 시간이 찾아온다. 참았던 말들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마구 쏟아진다. 그녀의 진실된 눈빛 덕분이리라. 힘든 삶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이보다 감사한 게 또 있을까? 다정한 언어는 차곡차곡 모여 작은 동력이 된다. 그러던 중, 남자의 등장에 이야기를 멈춘다. “한 번 마셔 봐.” 탁자에 올려진 달고나 커피 두 잔. 소박한 행복은 목을 타고 천천히 녹아내린다. 이렇듯, 용기를 내서 강을 건너면 비로소 소중한 사람을 만날  있다. 배가 멈춘 마을, 여기서 사랑을 전하고 마음을 나누면 된다.






저녁 열한 시. 유럽과 미얀마, 그리고 호주에서 모인 여섯 명이 재회한다. 서로의 곁에서 행복한 기억을 천천히 더듬는다. 첫 만남의 새벽 수다, 한강의 미지근한 공기, 칵테일에 취했던 시간과 오늘. 지나간 장면은 저마다 다르게 쓰여 있지만, 그때를 추억하는 방법은 비슷한 듯하다. 모두의 얼굴에 옅은 행복이 어려 있는 걸 보면.


어둠이 내린 자정 무렵, 바람이 분다. 얇은 대나무가 느릿느릿 움직인다. 창밖의 밤 풍경이 고요를 불러일으키자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감정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와 동생은 사라진 집에 대해 말한다. 누구도 우리의 아픔을 되물어보지 않는다. 때로는 침묵이 몇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 순간 울음이 터져 나온다. 엄마가 생각나서, 아빠가 안쓰러워서, 고통의 늪을 홀로 걸어 나온 막내에게 미안해서. 지금 이 순간, 눈물을 참을 이유는 없다. 위기를 함께 이겨낸 이가 있으며 그 슬픔에 동참해줄 이들이 있으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슬퍼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복한 추억. 그러니까 지나간 삶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것 덕분에.” 


새벽의 한 부분을 흘려보내던 중, 동생의 한마디가 마음을 울린다. “내일 피아노 소리로 아침을 깨워주는 사람이 언니였으면 좋겠어. 그건 늘 언니의 할 일이었는데.” 나의 할 일, 꽤 오래전부터 이어진 작은 습관. 가장 선명한 기억을 떠올린다. 눈을 뜨면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 소곡집을 펼쳤던 어린 시절을. 아마도 밥 짓는 냄새가 났던 것 같다. 엄마가 아침 식탁을 책임지는 동안, 아빠는 거실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따금씩 그들은 함께 가사를 읊곤 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이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엄마와 아빠의 미소가 담긴 아침의 노래를, 애틋했던 한때를.



많은 이들이 두려움을 안고 하루를 여는 요즘. 새의 지저귐과 바람 소리에 섞여 사색한다. 눈 내리는 아침이나 눈시울을 붉히고 나누는 대화, 어떤 날의 진하고 소중한 감정 같은 것들. 순간은 금세 흩어져 버리지만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기억은 영원을 남길 테니까.


그리고 기도한다.


바람이 불고 봄이 왔을 때, 나무들이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계절을 알릴 때, 사람들의 옷차림이 얇아지고 꽃잎이 흐드러질 때, 다시 자유를 찾게 되기를. 내가 사랑한 모든 시간이 오래도록 따스하기를. 또 눈부신 회상은 무너진 삶을 일으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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