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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pr 02. 2020

조금 천천히 달릴 것

봄이 왔으니까, 천천히, 느릿느릿 눈부신 햇살 속으로.

봄이 코끝에 스친다. 벚나무 아래에서 머뭇거린다. 아직 겨울을 보낼 자신이 없기 때문.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지만, 늘 아쉬움을 준다. 3월의 끝무렵, 겨울 가디건을 꺼내 입는다. 설국의 아름다운 장면과 모자 쓴 눈사람이 그리워질까 봐. 그런 후에는 눈부신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간다. 봄의 향연을 누리기 위해. 사랑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





연습실에서 나온 오후.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자전거를 탄다. 익숙한 길을 따라 천변으로 향한다. 앞서 가는 남자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나의 예상이 맞다면 그의 행동은 속도를 맞추기 위함이리라. 두 사람의 간격이 벌어지지 않게. 이마에 닿는 따스한 바람이 회상으로 이어진다. 청청한 하늘 아래 수업을 들어야만 했던 봄날, 강의실에서 나와 몰래 연못으로 달려 나갔던 순간, 만개한 꽃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킨 날들.


2년 전, 초록이 된 벚나무를 보고 먼 훗날의 벚꽃 산책을 약속했던 군인의 목소리를 더듬는다. 절절했던 마음과 그리움이 쏟아진다.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며칠뿐이었으니까. 남해와 대전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감정을 껴안아야 했던, 고요를 사랑해야만 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그는 내 슬픔을 알아챈 눈치다. “너는 군대 얘기만 하면 울더라.” 그토록 바랐던 순간 앞에서 어찌 덤덤할 수 있을까. 우리의 긴긴 역사를 헤아려 본다. 아마도 연애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넘긴 달력은 스무 장 이상. 그런데도 벚꽃 산책이 처음이라니, 신선하다.



두 해가 흐르는 동안 자목련의 나이테에 새겨진 것들을 상상한다. 비바람을 이겨낸 나무가 피워낸 시간은 얼마나 고귀한가.





개강이 미뤄진 탓에 게으름이 늘었으며 적막이 길어졌다. 하지만 철없는 소리를 해보자면, 좋은 점도 있다. 땡땡이를 치지 않고도 즉흥 나들이가 가능하다는 것. 꽃잎이 다 떨어질까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는 것. 빛나는 세상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 졸 일도, 만개한 봄의 장면을 외면할 일도 없다는 것.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들의 모습에 민낯 나들이를 후회한다. “화장 좀 하고 올 걸.” 그는 묻는다. “화장품은 있어?” 하하하. 연애 초반에는 데이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단장을 했던 것 같은데. 몇 번의 계절을 흘려보낸 우리는 서로의 느슨함에 물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파릇파릇하니까.라는 뻔뻔한 생각을 하며 환하게 미소 짓는다.


나는 이런 시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소박하고 따뜻한. 당신과 함께 하는 재미있는 출사.



“엄마가 집에 감자전 있다는데?” 나는 ‘감자전’ 한 단어에 돌아서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미얀마식 나시고랭과 쌀국수를 먹는 건데, 산책 후의 목적지는 자연스레 당신의 집이 된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이 정도면 첫 번째 벚꽃 산책은 성공이니까. 아니,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고.


다시 페달을 밟고 느릿느릿 움직인다. 봄이 주는 기운을 충분히, 오랫동안 받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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