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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19. 2020

나에게 건네는 위로

실패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 없는 법.

 여름이 깊어가는 동안,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매일 밤 조금씩 야위었으며 자주 지쳤다. 물을 주지 않아 바싹 마른 식물처럼. 휴식과 숙면이, 멀리 있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하루는 엄마가 말했다. 밥은 먹는지 걱정된다고. 이마가 화끈거렸다. 그다음엔 눈꺼풀이 떨렸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내 마음을 알아챈 듯하다. 여름의 무게가 버거웠던 딸의 한숨이 엄마의 슬픔으로 번진 것.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하고 싶은 말을 잠시 미뤄두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저녁 무렵,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낸 이들을 만났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수많은 감정을 토해내면서 영원 같은 찰나를 만드는,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해주는 연주자들. 고요한 선율이 마음에 닿자 미소가 번진다. 황홀의 밤은 희망을 안겨준다. 음악은 누군가의 슬픔을 지울 수도, 누군가의 인생을 위로할 수도 있다는 사실 같은.






 6월, 가장 익숙한 것들과 이별해야 할 때. 시를 읽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꽤나 평범한 날들을 보냈다. 많은 시간이 악보 속에서 흘러갔다. 돌이켜보니 소중한 순간은 넘치도록 많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내 마음은 늘 분주했으며 언제나 배가 고팠다. 양상추 사는 걸 미루다 오렌지 샐러드를 한동안 못 먹을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른 적은 없다. 밤이 되면 위가 목소리를 높이며 아우성을 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배고픔보다 피로가 더 컸기 때문. 야식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잠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던 어느 밤에 깨달았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허기가 마음에서 왔다는 사실을. 나는 할머니의 안부를 묻거나 엄마와 통화하며 평정심을 되찾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한없이 요동치던 위가 잠잠해졌다. 참 신기한 일이다.

 여섯 시가 되면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눈물을 참아야 했던 나의 마지막 학기. 도서관에서 책 한 권 읽지 못 한 나 자신이 조금은 밉다. 한 번쯤 작은 일탈도 해 볼 걸, 후회되기도 하고. 지난날에 최선을 다했다고 믿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별개의 일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 자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러니 남은 계절은 더 천천히, 마음껏 향유해야지. 긴 여정에서 기쁨을 찾던 순간도, 고단한 밤의 장면도, 곧 그리움이 될 테니까. 무대가 막을 내려도 여름의 찬연한 기억은 계속될 테니까.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아침이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짐을 챙겼다. 머리끈 몇 개와 카메라, 칫솔, 빗, 그리고 레몬밤. 그런 뒤에는 여름의 언저리를 향해 걸었다. 잊지 못할 계절 속으로.

 오후 세 시. 무대 위의 떨림을 모른 척한다. 음악이 없는 조명 아래 춤을 추거나 건반을 쓰다듬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곧 청춘의 한 단락이 또 한 번 매듭지어질 테다. 그 모양이 불완전하고 조금은 어설플 지라도 나는 그것 또한 힘껏 껴안아주기로 했다.

 리허설이 시작되면서 몸의 온도가 높아진다. 땀을 흘리며 부채질 하자, 페이지 터너가 말한다. “난 안 더운데? 그건 연주자들의 열기야.” 결국 뜨거움을 받아내며 연주를 이어간다. 가끔은 투박한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몰입은 실수를 지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헤매던 흔적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울려 퍼지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이 찰나를 위해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그토록 꿈꾸던 밤과 마주한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을 연주한다는 것,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긴장과 두려움 사이에서 손을 올린다. 소리는 반짝반짝 빛이 나가도, 조금 머뭇거리기도 하면서 공기 중으로 번졌다. 나는 한참 동안 비행했다.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악보 속을 헤맬 때면 아쉬운 탄식이 새어 나오곤 했다. 음악은 어떻게든 흘러갔다.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났으며 붙잡고 싶은 순간도 끝이 났다.

 장렬하게 퇴장하고 싶었건만, 나는 지친 몸으로 겨우 일어설 뿐이었다. 숨을 참고 객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눈물을 쏟았다. 어째서 매번 넘어지는가. 왜 늘 울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언제쯤 실패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가. 작은 물음을 반복하면서.



 다시 무대로 나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엄마의 눈물. 그녀는 말했다. 여섯 살짜리 꼬마가 언제 이렇게 컸냐고, 또 혼자 얼마나 힘들었냐고. 결국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한없이 감사해서. 내가 지금 서 있는 건 엄마 아빠의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객석을 지키는 든든한 지원군,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밤을 내어준 인연들, 호흡을 맞추며 서로에게 물든 사람들, 소중한 친구들. 그들의 응원에 무사히 막을 내린 유월의 어느 밤. 빛나는 순간을 선물해준 모두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실패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 없는 법.

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내일을 기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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