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대형 도시 한복판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은 현대 문명인 중에 뉴욕시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불쾌해하거나 다짜고짜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뉴욕, 즉, 마천루와 관광명소가 몰려있는 뉴욕은 맨해튼이라는 작은 자치구 하나에 불과하다. 물론 요즘에는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덤보(DUMBO), 그리고 브루클린 다리의 인기에 힘 입어 브루클린에 대한 인지도 역시 상당히 올라간 편이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제외한 뉴욕시의 다른 자치구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래퍼 Nas
이스트 코스트(East Coast) 힙합 씬의 전설적인 래퍼인 나스(Nas)는 그가 2012년도에 발표한 <A Queens Story>란 곡에서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무지를 꾸짖듯이 '디스' 한다. 마치 '너희가 진짜 뉴욕을 아느냐'라고 묻는듯한 이 곡에서 나스는 맨해튼으로 대표되는 뉴욕의 화려함이 아닌, 그가 성장한 퀸즈(Queens)로 대표되는 뉴욕의 거칠고 삭막한 면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이렇게 따진다.
브루클린이 다 가져가고,
Brooklyn keep on taking it
맨해튼이 다 해 먹으니,
Manhattan keep on making it
결국 퀸즈만 소외되는 거 아니냐고. Trying to leave Queens out
그리고 이렇게 소외된 거리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결국에는 가난과 폭력에 의해 죽어간 친구들을 기리며 그들을 위해 높이 잔을 들자고 외친다.
Drinks in the air!
나스에게 욕먹을 정도의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퀸즈는 분명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울 정도로 상당히 독특하고 재미난 분위기를 내는 곳이다. 일단 퀸즈는 매우 크다. 얼마나 크냐면 뉴욕 시 면적의 40프로를 차지할 정도로 크다. 자치구들 중 가장 큰 땅 덩어리를 자랑한다. 물론 크고 무식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문화들이 살아 숨 쉰다. 이는 퀸즈에 JFK 국제공항과 라과디아 공항이 모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의 영향이 크다. 두 공항의 존재로 퀸즈는 뉴욕의 관문 같은 곳이 되었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이민자 출신 거주민들이 밀집하게 되어 현재는뉴욕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된 것이다.
퀸즈의 플러싱
예전에 퀸즈에 정착한 이민자들 중 대다수가 이탈리아, 그리스 및 아일랜드계 출신이었다면, 지금은 히스패닉 및 아시안계 이민자들이 빠른 속도로 퀸즈에 터전을 잡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퀸즈의 대표적 번화 구역인 플러싱(Flushing)이다. 플러싱은 이미 거주민의 60프로 이상이 동양계다. 몇십 년 전만 해도 플러싱의 건물들을 도배하고 있던 아이리쉬계 성을 딴 간판들은 이미앙증맞은 캐릭터가 새겨진 팥빙수나 버블티 간판들로 교체된 지 오래다. 심지어 송아지 커틀렛과 링귀니로 유명세를 떨치며 오랜 시간 플러싱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오던 이탈리안 식당 역시 최근에 문을 닫고 북경오리집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파리바게트' 매장이 '스타벅스' 매장보다 더 크고,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영어보다 중국어나 한국어가 더 자주 들릴 정도로 대규모 동양인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플러싱은 같은 기간 내에 뉴욕시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7배나 높은 사업체 증가율을 보였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속화된 이러한 변화는 더 많은 기회와 더 나은 삶을 찾는 수많은 이민자들을 플러싱으로 끌어들였다.
내가 만난 리웨이 씨도 한때 부푼 꿈을 품고플러싱에 입성한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Queens Story는 플러싱이 아닌, 플러싱이 자리한 뉴욕 땅으로부터 무려 12,000 킬로미터나 떨어진 중국 랴오닝 성(辽宁省)의 어느 외딴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리웨이 씨는 어렸을 적부터 생강 농사를 하는 부모님을 따라 밭에 나가 부지런히 생강을 따는 굳센 딸이었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어린 남동생까지 딸려있어 밭일이 끝나면 집안일까지 거들어야 했음에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을 정도로 착한 딸이기도 했다. 게다가 동생이 어느 정도 자라자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홀로 사이판으로 건너갈 정도로 억척스러운 면도 있었다. 하지만 아스팔트도 뚫고 자란다는방동사니 풀처럼 억센 리웨이 씨에게도 어린 나이부터 홀로 하는 타지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사이판의 의류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을 하다 보면 허리도 시큰거리고, 때론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등이 아파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침대맡에 붙여둔 가족사진을 보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이처럼 불굴의 의지를 가진 리웨이 씨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2000년대 초 사이판의 의류 산업이 불황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하면서 리웨이 씨의 공장 역시 경영난에 빠진 것이다. 결국 직원들 사이에서는 공장이 대규모 인원 감축에 들어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게다가비교적 경력이 짧은 어린 직원들부터 정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 당시 이십 대 초반에 불과했던 리웨이 씨는 이 폭풍을 피할 방법이없어 보였다. 보통의 청년이라면 이 시점에서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했어"라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겠지만,5불짜리 스테이크만큼 질기고 억센 우리의 리웨이 씨는 포기를 모르는당찬 여성이었다. 리웨이 씨는 해고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공장을 나와식당 종업원으로써의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리웨이 씨는 식당 일에도 곧장 적응했다. 식당 일은 공장일만큼이나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활기찬 태도는 기본인 데다가 우렁찬 목소리라는 옵션까지 장착한 리웨이 씨는 식당 주인에게도, 손님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외국인 손님들은 그런 리웨이 씨에게 늘 넉넉한 팁(Tip)을 쥐어주었고, 그 짜릿한 손맛에 익숙해진 리웨이 씨는 더욱더악착같이 일하곤 했다. 식당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파김치가 되어 밥 한술도 못 뜬 채 잠자리에 드는날들이 이어졌지만, 이른 새벽이 되면 리웨이 씨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어김없이 또 집을 나섰다.
하지만 세상은 이번에도 리웨이 씨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일본 동북부 태평양 연안에서 발생한 지진이대규모 쓰나미를 일으켜 일본의 도호쿠 연안 지역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일본을 덮친 쓰나미는 언뜻 보면 사이판, 그리고 리웨이 씨와 큰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사이판 경제를 먹여 살리고 있던 건 그 당시 사이판 전체 관광객의 70프로나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관광객들이었다. 쓰나미 피해로 인해 사이판의 돈줄과도 같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기자, 사이판의 경기는 크게 휘청거렸고, 리웨이 씨가 일하던 식당 역시 얼마 안가 문을 닫게 되었다. 리웨이 씨에게 찾아온 두 번째 위기였다.
대규모 경제 불황에 이어 이번엔 대규모 쓰나미까지 예고 없이 그녀의 작은 삶을 덮치자 아무리 리웨이 씨라 할지라도 별 다른 방도가 없어 보였다. 리웨이 씨는 자신의 잘못도 아닌 외부적인 힘에 의해 일터에서 한 번도 아닌,두 번씩이나 쫓겨나게 되자 문득 인생에는 노력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운명이라는 그 큰 물결에 희롱당하며 부질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허탈함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고된 육체노동 뒤에도 늘 밝고 힘이 넘쳤던 리웨이 씨였지만, 한번 이러한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자 좀체 기운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사이판에서의 생활을 정리할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짐을 쌌다. 그리곤 황량하리만큼 텅 빈 방에서 홀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금붕어 마냥 눈만 껌뻑거리며 출국일을 기다렸다.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건 그녀가 오랜 기간 몸 담았던 식당의 주인아저씨였다. 식당일에 큰 도움이 됐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버린 게 안타까웠던 것인지, 아니면 늘 밝고 명랑하던 그녀가 방 안에서 죽은 식물처럼 지내는 게 안타까웠던 것인지, 식당 주인아저씨는 리웨이 씨의 집을 찾아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플러싱'이라는 곳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는 리웨이 씨 같이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분명히 재기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플러싱엔 자기가 잘 아는 사람도 한 명 있다면서 연락처도 건네주었다. 하지만 아직 패배감이라는 깊은 수렁 속에 빠져있던 리웨이 씨는 홍콩이나 대만도 아닌 머나먼 미국 땅까지 날아갈 염두가 나지 않았다. 선뜻 연락처를 받기를 머뭇거려하는 리웨이 씨에게 주인아저씨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면서, 리웨이 씨 같은 젊은이들이 돈을 벌고 성공하려면 결국 큰돈이 모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다그쳤다. 식당에서도 결국 늘 가장 많은 팁을 주었던 건 미국인 손님들이 아니었냐고도 했다. 그건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범한 가족단위의 미국인 손님들도 늘 평균 이상의 팁은 놓고 갔고, 술이 얼큰하게 취한 미국인 아저씨들도 엉큼한 눈빛과 함께할지언정 팁만큼은 확실하게 주고 갔었던 것이다.
리웨이 씨가 수긍하는 눈치이자 신이 난 식당 주인아저씨는 쐐기를 박기 위해 뉴욕에선 리웨이 씨만 열심히 한다면 사이판에서처럼 경기 침체로 공장이 문을 닫는 일도, 쓰나미가 몰려와 식당 문이 닫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통 큰 예언까지 했다. 아마 너무도 젊은 나이에 기가 꺾여있는 리웨이 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말이었겠지만, 불과 삼 년 전에 '뉴욕발 금융위기'로 공장들은 물론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들까지 줄줄이 파산했고, 또 2012년엔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의 지역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걸 생각해보면 주인아저씨가 한 말은 '펠레의 저주'만큼이나 무책임한 예언이었다.
지독했던 가난과 두 번의 쓰라린 실패로 좌절감을 맛 본 리웨이 씨였지만, 그녀는 결국 다시 한번 과감하게 세상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연락처가 적힌 쪽지 한 장과, 돈벌이는 확실히 보장된다는 말 한마디만 믿고 리웨이 씨는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도착해 느낀 플러싱의 공기는 차고 텁텁했다. 행인들의 웅성거림과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공항과 철도역의 소음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불협화음도 마치 다른 세계의 소리처럼 들렸다. 이질적인 공간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앨리스처럼 플러싱의 거리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가죽잠바를 입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40대 남성이 다가왔다. 식당 주인아저씨가 소개해준 남자였다.
그의 소개로 리웨이 씨는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장 익숙했던 종업원 일부터 시작해 주방 보조, 야채 썰기, 화장실 청소 일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식당 주인아저씨의 말대로 플러싱엔 할 일도 넘쳐났고, 봉급도 확실히 높았다. 하지만 돈은 생각만큼 쉽사리 모이지 않았다. 비싼 월세와 생활비가 문제였다. 늘 1불짜리 만두 두어 개로 끼니를 때우며 생활비는 어떻게든 줄일 수 있었지만 월세만큼은 도저히 줄일 방도가 없었다. 결국 월세를 줄이기 위해 리웨이 씨가 선택한 건 주거와 숙박이 보장되는 상주 간병인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변변한 학위도, 기술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상주 간병인 일은 월세를 아낄 수 있다는 확실한 장점은 있었지만, 24시간 동안 환자를 신경 써야 하는 격무였다. 무엇보다 요리나 청소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 수많은 일과들 중에는 몸이 불편한 환자들의 어깨나 다리 등을 주물러 주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리웨이 씨는 이 일에 조금이라도 더 능숙해지기 위해 인터넷에서 '테라피 마사지' 수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던 와중 자신과 같은 처지의 젊은 여성들도 짧은 시간 내에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광고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광고에 놀라 조금 더 자세히알아보자 인터넷에는 한 달에 5000불 이상의 수입을 보장해준다는 광고들이 DMZ 일대에 매설된 지뢰만큼이나 많이 깔려있었다. 그중에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어준다는 광고도 보였다.
그날 이후 리웨이 씨는 청소를 하면서도, 아픈 할머니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5000불의 월급이 가져다줄 수 있는 힘과 구매력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빛의 출현을 목격한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여기서 멈추라고, 그만하라고 다그쳤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 새로운 빛을 강렬하게 희구했다. 그녀 안에서 이성과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또 갈등했다. 하지만시간이 흐를수록 리웨이 씨의 이성과 합리적 판단력은 욕망이라는 힘에게 슬금슬금 잠식당했다. 결국 얼마 안가 리웨이 씨는 간병인 일을 그만두고 성매매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
내가 리웨이 씨를 처음 만난 건 그녀가 그렇게 성매매 일을 시작하고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인, 강렬한 햇살이 창살처럼 땅에 내리 꽂히는 어느 쨍한 여름날이었다. 그 당시 여름 인턴이었던 나는 '쪼렙'답게 회사가 초청된 콘퍼런스나 행사에 하나도 빠짐없이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우리 회사 대표 신분으로 한 여성 인권 단체가 주최한 성매매 피해자 여성들을 초청한 콘퍼런스에 참석 중이었다. 리웨이 씨는 그날의 발표자들 중 한 명이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난 '노동의 신성함'이나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와 같은 말을 굳게 믿고 있던 낭만주의자였다. 그래서 성매매 여성들을 만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 이렇게 자신의 몸을 함부로 쓰지 마세요"나 "원래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시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세요" 따위의 말들로 그들을 위로하고, 또 갱생시킬 수 있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굳은 의지와 희망만 갖는다면, 그들이 언젠가는 성매매라는 족쇄를 끊고 합법적이고 '평범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의 난 이 세상엔 의지라곤 가질 수도 없을 만큼 깊은 늪 안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희망이라곤 가질 수도 없을 만큼 기나긴 터널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도 아직 제대로 실감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고, 조금만 더 참으라는 충고를 해주는 것은 MP3 플레이어가 없는 사람에게 이어폰을 선물해주는 것만큼이나 헛되고, 두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 자전거를 선물해주는것만큼이나 잔인한 짓이라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그날 리웨이 씨와 다른 여성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 듣는 성매매 여성들의 비참하고도 복잡한 사정들은 나의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날 콘퍼런스에는 남성 손님의 매질에 밀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던 여성도, 수많은 손님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태적 행위를 강요받았다던 여성도, 심지어는 권총을 들이미는 경찰관에게 성행위를 강요당한 적이 있었다는 여성도 있었다. 하나같이 다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녀들이 겪는 가장 큰 불행은 그녀들이 자신들이 겪는 불행을 사회를 향해 당당히 따질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사회의 음지에서 상처 받은 그녀들의 항의는 양지의 사회가 쉽게 이해해주고, 동정해주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들 중대부분은자신의 불행이 본인의 타락과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라고 아픈 소리를 했을 시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더럽혀진 몸과 입으로 뻔뻔하게 잘도 지껄인다"며 던질 돌들을 죽는 것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리웨이 씨는 그 날 발표를 마치면서 짧은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평생을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왔어요. 하는 모든 일에도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삶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전 이제 정말 구제불능의 죄인이 되어버린 걸까요?"
리웨이 씨의 말대로 그녀는 분명 평생 최선을 다 해 살아온 듯했다. 그렇다면 리웨이 씨의 삶은 정말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 나라의 역사든, 한 사람의 인생이든, 모든 운명에는 그 운명을 결정짓는 몇 개의 전환점, 또는 터닝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그 터닝포인트란 것이 어쩔 때는 너무나도 쉽게 눈에 보일 때도 있지만, 어쩔 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지난 후에나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때도 있다. 리웨이 씨의 죄는 그녀가 5000불짜리 아메리칸드림의 유혹에 넘어간 순간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월세를 아끼기 위해 상주 간병인으로 일 할 때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식당 주인아저씨의 말만 믿고 플러싱으로 날아온 시점부터 모든 게 잘못된 걸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어린 나이부터 리웨이 씨를 일터로 내몬 그녀의 부모님의 가난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큰 죄였을 수도 있다.
이렇듯 한 개인의 삶에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있고, 그 개인의 현재란 것도 결국 그 수많은 사정들이 켜켜이 조금씩 쌓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있던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녀의 잘못을 콕 집어 말해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충고하려 들 수 없었다. 긴 이야기를 끝낸 리웨이 씨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말없이 박수를 쳐주며 다음에 또 그녀를 만났을 때엔 그녀의 무거운 현재가 조금은 더 밝고 가벼워져 있기를 응원해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작년 콘퍼런스에서 우리는 리웨이 씨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리웨이 씨는 작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새로운 삶을 찾겠다는 다짐을 했던 리웨이 씨는 결국 또 성매매 현장으로 복귀했고, 경찰의 현장 급습을 피하던 와중 4층짜리 건물에서 떨어져 바로 그다음 날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결국 작년의 콘퍼런스에는 리웨이 씨가 아닌 그녀의 장례를 위해 머나먼 랴오닝 성에서 날아왔다는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참석했다. 몇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머나먼 타지로 떠난다는 딸을 말리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고, 그리고 착한딸에게 가난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한 것이 미안하다며 흐느끼던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평생을 죄인의 마음으로 살게 된 리웨이 씨의 어머니는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플러싱의 어느 한 지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어쩌면 그렇게라도 자신의 죄를, 그리고 리웨이 씨의 죄를 보속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러싱의 거리에는 아직도 그 누구의 용서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다. 색색의 네온사인이 24시간 동안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그곳에는 리웨이 씨와 같은 직업여성들이 아직도 차가운 겨울바람과, 그보다 더 냉랭한 사회의 시선을 견디며 호객 행위를 이어 가고 있다. 오늘도 그녀들의 외침은 가련한 노랫소리처럼 허공에 울려 퍼진 뒤, 이내 도시의 소음 속으로 흩어지고 있다.
"마사지? 마사지?"
리웨이 씨의 어머니는 미국에 있는 동안 교회에서 주는 고구마나 과일들을 안 먹고 잘 모아두었다가, 늦은 시각까지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성매매 여성들의 발치에 놓고 가곤 했다고 한다. 세상이 자신들에게 던질 돌을 두려워하는 그녀들에게, 리웨이 씨의 어머니는 두 손에 돌을 드는 대신 고구마와 과일들을 든 것이다. 거리의 젊은 시인 나스 역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돌 대신 잔을 들자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