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1년째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다.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교육자의 길은 참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가끔씩 힘든 일이 생기고, 지칠 때는 교육자의 길에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교육자의 길만 그렇겠는가? 모든 일이 보람 있고, 재미있을 때는 더없이 좋다가, 힘들고 지칠 때는 회의감이 들면서 '내가 이 일을 잘하고 있나?', '내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교육자의 길을 걷다 회의감이 드는 순간 '내가 의미 있는 교육을 하고 있나?', '나는 좋은 교육자인가?', '좋은 교육자란 어떤 교육자일까?'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교육을 하면 할수록 이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기 어렵다. 이 답이 맞다 생각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는 경험을 종종 한다. 아직도 좋은 교육자의 상에 대한 나의 생각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은 듯하다. 미래의 언젠가 생각이 달라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생각하는 좋은 교육자의 상에 대해 글로 남겨보려 한다.
4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했다. 하나씩 아파오는 몸을 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이직한 회사가 지원하는 체력 단련비도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드는데 한몫했다.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하는 만큼 다치지 않기 위해 PT를 받기로 했다. 내 성격상 누군가에게 1:1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죽을 만큼 싫었지만 운동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PT를 시작했다. 트레이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이도 있는 만큼 다치지 않으면서 운동하는 것이 목표이니 중량은 높이지 않았으면 좋겠다.'였다. 트레이너들은 나의 요구대로 중량은 높이지 않으면서 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2년 반을 운동했다. 2년 반 동안 운동하면서 약간의 유연성과 근력은 좋아졌지만 내 기대만큼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2년 반 동안 트레이너가 3명이나 바뀌었다. 헬스장 대표 또한 2번이나 바뀌었다. 네 번째 트레이너를 만났다. 네 번째 트레이너에게도 '나이도 있고, 다치지 않기 위해 중량은 높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같은 요구를 했다. 그런데 네 번째 트레이너는 '그렇게 운동하면 운동 효과가 적다. 자세만 잘 잡으면 중량이 높아져도 절대 다치지 않는다.'라면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만나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믿음도 크지 않았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트레이너를 믿고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중량을 높이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내 예상이 맞았다. 중량이 높아지면서 나는 여기저기 아픈 곳도 생기고, 다치기도 했다. 아프다는 핑계와 다쳤다는 핑계로 운동을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트레이너는 '괜찮다. 아픈 곳이 있으면 아프지 않은 곳으로 운동하면 된다.', '아픈 곳, 다친 곳을 회복하면서 운동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운동을 빠지지 않고 지속하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운동을 지속했다.
네 번째 트레이너를 만나고 2년이 지났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트레이너가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중량을 높인다. 높은 중량이더라도 자세가 바르면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끔씩 아픈 곳이 생기면 회복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몸 상태에 따라 중량과 운동량을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요구를 적극 수용했던 앞선 3명의 트레이너와 나의 요구에 반하지만 자신의 운동 방법을 전하려 노력한 네 번째 트레이너 중 어느 트레이너가 좋은 교육자일까? 수강생의 현재 상태에 달라지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교육생은 나와 같은 요구를 하지 않을까?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우는 교육생은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만들고,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교육생이 느끼는 두려움을 줄여주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 다음 단계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교육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이지 않을까?
어느 순간부터 '소비자가 왕이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 영향 때문일까? '무조건 소비자의 요구, 고객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최초 이 말이 등장했을 때의 의미는 소비자와 고객의 요구를 무조건 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다 보니 이런 경향이 생긴 건 아닐까?
소비자, 고객은 물론 중요하다. 나 또한 의미 있는, 좋은 교육을 하려면 교육생의 입장에서 교육을 설계하고,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육생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교육생들이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미술, 음악, 체육 수업은 없애 달라.', '매일 등하교하는 것이 힘든데 재택 학습할 수 있도록 해달라.', '풀이 과정은 몰라도 괜찮으니 정답만 알려달라.'와 같은 요구를 할 때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좋은 교육을 하는 것인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지금 단계에서 한 단계 성장하려면 상당 시간의 노력과 고통이 따른다. 이 명제는 바꾸려야 바꿀 수 없다. 수많은 학원과 교육 기관이 지름길이 있다고 유혹하지만 지름길은 없다. 짧은 순간 지름길이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긴 시간으로 봤을 때 지름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좋은 교육자라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성장하려면 극복해야 하는 과정이라 설득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을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좋은 교육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지 않을까?
맞다.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저 길이 교육자가 지향해야 할 길이라는 것을...
하지만 2023년,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을 하기 너무 힘들다. 혼자 저 거대한 교육 시스템에 도전하기도 두렵고, 도전한다고 의미가 있겠는가? 괜스레 도전했다가 무참히 깨져 상처만 남을 뿐이다.
맞다. 교육은 어떤 다른 분야보다 거대하고, 보수적이다. 정말 변화가 더디다.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거대한 벽과 같다. 그런데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교육생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면서 사는 삶은 안전한가? 괜찮은 삶인가?
현재와 같은 교육 시스템에 안주하며 사나, 교육 시스템에 도전하는 삶을 사나 미래가 불확실하고,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교육을 하며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살면 오해도 받고, 좌절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가 좋은 교육자인가?', '내가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에 조금은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아나. 교육 시스템에 도전하는 삶을 살다 나만의 경쟁력 있는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우리의 삶에 정답은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