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것
사람들은 소위 잘나가는 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검·경 연예인 스포츠 스타를 소개하는 기사는 많지만 평범한 이웃들의 삶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들도 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밤이 되면 집 앞 경의선 책거리를 자주 걷습니다. 걷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스며듭니다. 내일 뭐 먹지. 유기견을 입양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 3년 후 난 뭘 하고 있을까. 나의 그녀는 대체 어딨는 거지.
그러다가 집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혼술 집에 들어갑니다. 바 테이블에 앉아 온면과 술을 주문한 뒤 펜과 종이를 빌립니다. 걸으며 정리했던 생각을 종이에 옮겨 적으려는데 술집 주인이 슬쩍 쳐다보며 말을 건넵니다. “밤인데도 날이 참 덥죠?”
이 술집의 이름은 ‘온도’입니다. 네이버에 ‘서교동 온도‘라고 검색했더니 이 술집은 안 나오고 ‘30℃. 어제보다 1℃ 낮아요’ 이런 것만 나오네요. 여기서 펜과 종이를 빌린 건 그때가 네 번째였지만, 술집 주인 최석(36)씨가 말을 건 건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본 손님에게 툭툭 말을 붙이는 타입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전 그 날 제 머릿속에 있던 고민들을 주인장에게 무람없이 털어놓았습니다.
이곳엔 혼자 술을 마시러 오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가끔 그들은 당신네 사연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하루는 참 밝아 보이는 30대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아이들 수학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나무 재질의 바 테이블에서 최석씨와 대화를 하던 여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얼마나 우울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다거나, 어두워지는 게 싫어서 밝은 이름으로 개명한 사실까지 털어놓았습니다. 어느 덧 취기가 오른 듯 여자가 시 구절을 하나 읊더랍니다.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영업시간은 새벽 5시까지인데 이날은 아침 8시에 문을 닫았습니다. 상처가 스민 얼굴을 애써 웃음으로 감추며 얘기하는 여자 앞에서 영업시간이 끝났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거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스시를 먹으며 펑펑 운 여자도 있었습니다. 회사생활에 지친 직장인은 오이폰즈를 먹으며 하소연했습니다. 가슴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돌아가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보면, 들어올 때보단 후련해보여서 조금 마음이 놓인 답니다. 그가 건넨 명함을 뒤집었더니 이런 글귀가 보이네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술집.’
마음이 따뜻해지는 술집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고 3때입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술을 마시러 명지대 골목에 있는 주점에 갔는데 글쎄 술집 주인이 가게 문까지 닫고 고민 상담을 해주더랍니다.
2007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일본에 갔습니다. 7년 유학 생활동안 음식점에서만 일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술집 몇 곳에서 일해 본 뒤 지난해 12월 ‘온도’를 차렸습니다. 온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술집.
그런데 대체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요? 최석씨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청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뭔가 결의에 찬 듯 바싹 민 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이찬양(35)씨는 최석씨보다 한 살 아래지만 아이가 셋이나 있는 가장이랍니다. 영업을 마치면 가게 테이블을 한 쪽에 미뤄 놓고 간이침대에서 잤다고 했습니다. 집이 경기도 광주라 새벽에 오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집에 자주 들어가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고맙답니다.
누군가를 위로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건 삶의 여유가 있는 이들만 할 수 있는 ‘베품’ 같은 게 아닌가 봅니다. 고단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인다면 세상의 ‘온도’는 한층 더 올라가지 않을까요.
물론 초심이 무뎌질 때도 있습니다. 손님의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었던 그 날도 한창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손님은 지인에게 열변을 토했습니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 그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아? 설령 그걸 아무도 몰라준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최석씨는 뒤통수 한 대를 후려 갈겨 맞은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지인들이 먼저 가고 혼자 남은 손님에게 다가가 감사 인사를 건넸습니다. 손님은 연남동에서 ‘무디(moody)’라는 바를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 깨달은 건 이겁니다.
“일본 소설 ‘우동 한 그릇’을 보면 우동 집에서 넉넉히 준 우동 한 그릇에 한 모녀가 큰 힘을 얻게 돼요. 오늘 우리 집에 온 남녀는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지도 몰라요. 어쩌면 부녀가 처음으로 술 한 잔하면서 마음을 터놓는 순간일 수도 있고요. 그 소중한 시간을 제 맘대로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설령 그 분들이 몰라준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제가 상수동에 살아서 문패가 ‘상수동 사람들’이었던 건데 얼마 전 서교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앞으론 ‘상수동·서교동·망원동·연남동’ 네 동네에서 인터뷰 한 뒤 그때그때마다 문패를 바꿀 계획입니다. 아마 다음 편은 ‘[연남동 사람들] 무디(moody)’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