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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현송 Jul 07. 2024

‘내 꿈’은 결코 ‘내’가 아님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올리버, 2024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세대이다

스무살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던 그 시기, 혜성처럼 등장한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그 당시 10대와 20대의 젊은 피들이 한번 쯤은 읽어야하는 권장도서였다. 책이 얼마나 잘 팔렸던지, 책 제목은 청춘을 말할 때 늘 떠오르는 어떤 밈처럼 쓰이기도 했었다. 나 또한 대학교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던 그 시절, 입버릇처럼 “아프니까 청춘이지!”를 외쳐가며 학기 중에도 아르바이트를 놓지 않았고, 급기야 학기중에도 일을 세 개씩이나 병행하는 신체적 무리를 감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없던 그때의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청춘의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의 그 열정과 독기 가득했던 눈빛은 어릴적 나의 동반자였던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나의 꿈은 그 누구보다 방대했고, 촘촘히 짜여진 오색의 방직물보다는 그저 색깔이 불규칙적으로 칠해진 캔버스 마냥 내 뇌리를 가득 채우던 상상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그 꿈은 너무나도 막연했던 나머지 그저 ‘돈’만 손에 있다면 생각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질거라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서른을 넘긴지 몇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을 몰랐기에 세상을 꿈꾸던 시기는 지나고 말았다. 나는 여전히 버릇처럼 꿈을 꾸고,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꿈 속의 나와 현실의 나라는 갭에 부딪히면서 지내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명작 중 하나인 <싯다르타>는 나처럼 꿈에, 혹은 열정에 지친 사람들이 한 템포 쉬어가기 위해 읽어야하는 책이다. 나도 모르게 앞만 보며 달리고 있을 때 한번 더 뒤돌아 보고, 주위를 둘러 보면서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라고 말해주는 책이다. 열정을 권유하지 않는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겪은 세대에게 그래도 되는걸까?라고 생각했다면 더더욱 이 책을 당당하게 권유할 수 있다.


“응, 왜냐하면 그 말은 출판사의 바이럴 마케팅일 뿐이었으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다' 세대들의 극공감 짤 [출처=네이버 블로그]







착각도 열정이다

싯다르타는 배움에 열정적인 사람이다. 그는 고집스러운 설득 끝에 부모 곁을 떠나 사문이 되고자  절친인 고빈다와 함께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 그곳의 사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꽤 만족하고 적응하려 노력하는 고빈다와 달리, 싯다르타는 더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싯다르타는 말했다. “(…) 오히려 마을의 창녀들이 있는 선술집이나 마부들과 노름꾼들 사이에 있었더라면 내가 지금까지 사문들한테 배운 것을 더 빨리 배울 수 있었을지도 몰라.” (p.25)


바라문 계급의 중산층 사제 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생을 종교의 가르침에만 얽매여 살아 온 그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듣기만 했던 ‘비종교’의 세계를 갈망하다 결국 고빈다를 두고 혼자서 떠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의 열정에는 저자인 헤세가 심어 놓은 납득될 만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그가 배움이 빨랐다는 점이다. 어릴 적부터 배움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영리한 아이였기에 스승들과 부모님의 칭찬을 받아왔고, 그 덕에 싯다르타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성장기에 얻은 칭찬은 자신이 어떤 것을 가장 잘하는지, 해낼 수 있는지 빨리 깨닫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지 않던가. 그렇게 싯다르타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있던 모든 순리와 원칙을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면서 홀로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싯다르타의 착각은 사바티 마을의 기원정사에서 완전한 현자인 ‘고타마’를 만났을 때에도 계속된다. 그는 마을에서 소문난 현자를 만나서 기뻤고, 신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타마를 경계하지 않았다. 고타마와 우연 끝에 대화를 하게 된 싯다르타는 고타마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옅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대해 말하게 된다. 그러자 고타마는 이렇게 답한다.


고타마는 반쯤 미소를 지으며 흔들림 없는 친절함과 수용의 자세로 이 이방인의 눈을 바라보더니,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몸짓으로 이별을 고했다. ”오 사문이여, 그대는 영리하군요.” 부처가 말했다. “그대는 영리하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군요. 친구여, 너무 영리한 것을 경계하시오.” (p.46)


싯다르타가 고타마에게 내뱉은 모든 걱정거리들은 자신이 고타마와 비슷한, 어쩌면 같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착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에게 이 말을 들은 뒤로 더욱 더 그를 존경하게 되고, 그러면서 동시에 다짐한다. “나는 어떤 사람 앞에서도 시선을 낮추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여행을 하던 싯다르타는 지난 날을 회상하며 회유와 참회의 사색에 빠지곤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색에 빠진 자신을 사랑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그를 한층 더 성장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될 때 쯔음, 싯다르타는 도시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아름답고 영리한 기녀(妓女) ‘카말라’를 만나게 된다.  성숙해진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남자 경험이 풍부하고 그 경험 덕에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던 그녀에게 간곡히, 그러나 자신감을 잃지 않고 사랑을 어필했다. 가령, “카말라! 당신은 이 싯다르타가 시선을 아래에 두지 않고 말을 건넨 첫 번째 여인입니다.(p.64)”와 같은 멘트로 말이다.

카말라는 거짓말 같이 싯다르타의 특별함을 알아보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자신감이 넘치는 두 남녀의 사랑이 열정으로 끝없이 불타오를 것만 같지 않은가? 하지만 예상과 달리 카말라와의 사랑은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싯다르타를 현재에 안주하게 만든다. 그는 사문들의 표식이기도 한 낡은 거적때기를 벗고 멋있는 옷과 신발을 사기 위해 돈을 벌고자 결심했고, 이를 위해 도시의 상인인 카마스바미를 찾아가 곁에서 상인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카마스바미와의 인연은 싯다르타에게 중요하게 작용했다. 카마스바미는 상인 일에만 평생을 몰두 하면서 돈을 걷지 못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화를 냈고, 짜증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런 그의 눈에 돈을 받지 못해도 화 한번 내지 않는 싯다르타가 오히려 이상할 뿐이었다. 싯다르타와 카마스바미는 그렇게 마찰을 빚게 되고, 싯타르타는 점점 깨닳음을 얻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태생은 종교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착각은 실수를 낳고, 실수는 성장을 낳는다

싯다르타가 도시생활을 후회할 때 즈음에는 머리가 쇤 중년이 되어있었다. 후회와 참회로 뒤덮힌 그는 영원의 단짝일 것만 같던 카말라를 떠나 다시 숲 속으로 향했다. 후회는 멈출 줄을 몰랐고, 결국 숲 속의 강가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싯다르타의 꿈은 책에서 언급된 적은 없다. 추측해보건데, 고타마를 넘어서는 현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 아니었을까? 세상 만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유명한 현자가 되는 그런 꿈 말이다. 어찌됐건 자신이 바랬던 꿈은 지금의 이런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쉽게 놓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전의 행보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싯다르타는 스스로를 익사시키기 위해 강 위에 누워있으면서도 사색을 놓지 않았고, 결국 자신이 있던 곳인 자연, 강가에서 머물며 새로 태어나기로 다짐한다.

그곳에서 젊은 시절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뱃사공 바수데바를 또 다시 만난다. 유난히 말이 없던 그가 싯다르타에게는 최고의 청자(聽者)가 되어주었다. 싯다르타는 바수데바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사공 일을 배우면서 점점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한 영락없는 뱃사공의 모습으로 변했다.

뱃사공으로써의 싯다르타는 점점 현자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고타마 추종자들, 카말라, 그리고 카말라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순례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된 고빈다 까지 싯다르타는 과거의 참회를 씻고 진정한 자신이 되고자 한 길을 걸음으로써 비로소 과거의 인연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우연을 겪게 된다. 그는 늙은 자신과 같이 늙어버린 옛 인연들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는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 때문에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 것들을 위해 끝없이 많은 것을 성취하고, 여행하고, 전쟁도 벌이고, 무한히 많은 고통을 겪고, 무한히 참아 가면서 사는 것이었다. 그는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p.140)


싯다르타가 생각했던 자기 자신,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열정적인 자기 자신은 사실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가 특별히 특출난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방법으로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착각과 열정, 실수를 통해 인간의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만난 고빈다와 참된 진리에 대해 대화하면서 스스로를 ‘죄인’이라 부른다.


“(..) 나도 죄인이고 자네도 죄인이야. 하지만 그 죄인, 자네이기도 나이기도 한 그 죄인은 앞으로 다시 바라문이 되거나 열반에 도달하고 부처가 될 수도 있어. (…) 즉 그 죄인 안에는 지금과 오늘이 이미 존재해. 미래의 부처가 존재하는 거지. 그의 미래는 이미 거기에 있고, 그 부처를 숭배해야 해. (p.153)


고빈다는 여전히 싯다르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싯다르타와 함께 순례길을 걸은 이후로 변함없이 순례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고빈다에게는 이해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빈다와 대화를 나누며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바로 고타마가 자신에게 지었던 무언의 미소였다. 싯다르타는 비로소 경험이 없는 자에게 말로써 지혜를 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되며 자신도 그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빈다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아프니까 인간이다

싯다르타의 여정은 비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흔한 우리들의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싯다르타의 자신감, 오만, 열정과 실수는 그가 인간 사회에서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 지혜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젊음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말이었다. 20대를 넘겨 버리면, 나의 인생은 마치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간절했고, 더 자신감이 넘쳤고, 더 오만했으며, 더 많은 실수를 해왔다. 실제로 스물 아홉때는 ‘실패자’가 되었다는 생각과 패배감에 마음의 병도 얻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도 있었냐는 듯, 30대가 된 지금 나는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다. 20대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업종의 사람들을 만나며 더이상 열정과 성장에 목메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며 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알아 차리는 것. 그것을 위해 천천히, 실수도 하고 쓰러져 보기도 하면서 끊임 없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저자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주고자 했던 성장통의 메세지가 아닐까 싶다.

그럼 이쯤에서 내 인생의 메세지도 다시 한번 고쳐써보자.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니까 인간이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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