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은 아끼고 아껴서 조심스럽게 써야 하고, 가장 가성비 있게 성장하는 데에만 사용해야 하는 것인데 여행의 시간은 흐르는 대로 가는 대로 보내도 되는 남의 시간처럼 느껴져. 흥청망청 시간을 써도 손해 보지 않는 기분이야. 그래서인지 마음이 편안해. 다른 무언가가 막 휘집고 들어와도 쉽게 동요하지 않아.
오늘은 마드리드 근처에 톨레도라는 지역에 다녀왔어. 기차 타고 돌아오는 길에 뒤에 앉은 스페인 아저씨가 내내 책상을 탁탁 치시더라고. 알지, 일반적으로 기차에서 승객에게 주어지는 탁상은 그 앞 좌석에 붙어있는 접이식 책상이잖아. 아저씨가 책상을 칠 때마다 찹찹거리는 진동이 등 위를 타고 지나갔어.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지. 나 원래 이런 것에 되게 예민한 사람이잖아.
기분 하나도 안 나빴어. 아 저게 저 사람이 통화하고 생각할 때 하는 습관이구나 하고 말았어. 이런 내가 신기해. 무지무지 행복해서 무엇도 나의 행복을 해치지 못하는... 그런 건 아닌데. 용인할 수 있게 돼. 내 기분의 궤도가 굉장히 정확하게 안정적이고 이 정도의 일로는 흐트러지지 않는 아주 건강한 상태랄까. 맞은편에서 담배 피우면서 걸어오는 사람을 만나도, 더러운 냄새가 나는 사람이 주변에 한참 있어도, 빤히 쳐다보면서 소극적인 인종차별을 하는 외국인을 만나도 그 사람들이 건드릴 수 없는 더 깊은 곳에 내 감정이 보호막을 치고 가만히 앉아 있나 봐.
아주 편안한 상태야. 행복해서 편안한 거 아니냐고? 아니야. 행복 말고 다른 단어가 필요해. 한국에 있을 때 주된 감정이 조급함과 불안이니까 아마 그 반대말이지 않을까 싶어. 느긋하다는 말로는 좀 부족해. 난 아주 잔잔해.
아까는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는 중이었어. 시선이 느껴져서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어. 어떤 여자분이 내 앞쪽에 서계셨어. 시선은 정말 내쪽에 있었어. 하지만 날 보는 건 아니고 내 뒤에 있는 뭔가를 보시던 중이었지. 몰랐는데 상품 사진이랑 가격이 적힌 커다란 포스터가 내 뒤에 붙어있더라. 그분이 나를 의식하고 손짓과 표정으로 '당신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걸 보고 있었어요. 오해 말았으면 좋겠네요'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 무심하게 보던 포스터만 봐도 큰 문제는 없을 텐데 시선을 받았다고 생각할 법한 내 마음을 신경써주는 게 고마웠어. 나도 눈과 미소로 '문제없어요. 편안하게 보세요'라고 전했는데 잘 닿았을 거야. 우리는 서로 편안한 미소를 주고받았어.
이곳에서 배운 대화법이야. 낯선 타인의 시선에 미소로 응답하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물론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미소 짓는 건 익숙지 않은 일이었어. 하지만 너무나 여유롭게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사람들을 몇 명 만나고 그 따뜻함을 맛보고 나니까 나도 다른 사람들을 보고 비슷하게 미소 띨 수 있게 됐어. 요즘은 내가 먼저 웃어보이는 경우도 많아.
꼭 타인을 위한 일만은 아니더라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내가 먼저 웃으면 대부분 상대도 나를 향해 웃어줘. 미소를 주고받으면서 상대방과 서로 적의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낯선 곳에서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돼. 결국 수혜자는 나인 거야.
톨레도 안에 소코도베르라는 곳에서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갈 법한 어린 여자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면서 나를 빤히 보더라고. 백인이었어. 아이들의 시선은 정말 솔직하기도 하지. 자기랑 영 다르게 생긴 내가 많이 신기했을 거야. '태어나서 처음 본 동양인 20명' 리스트에 내가 이름을 올리는 중일 수도 있어.
눈이 마주치니까 난 또 웃었지. 학교에 가서 동양인 친구들이랑도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랬더니 아이가 되게 수줍어하면서 몸을 비틀고 씨익 웃더라고. 너무 귀여워서 다시 웃었어. 그 애는 걸어가다가 나를 돌아보고, 또 가다가 다시 돌아보고, 길을 건너서 또다시 나를 돌아봤어. 착각일지 모르겠어. 난 어릴 때 친해지고 싶거나 마음 가는 사람한테 그랬는데. 날 되게 좋아하는 눈빛이었다고~~! 히히
미소로 대화하는 방법을 익힌 뒤에 이런 에피소드가 생겨나는 게 좋아. 여행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전부 이런 일이야.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그림보다도 오래 가져가고 싶은 기억은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일이야. 내 시간이 가장 입체적으로 변하는 때는 무생물보다 생물과 함께할 때인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계속 적으면서 다니고 있어. 뭔가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일기장을 펴고, 여의치 않으면 휴대폰 메모장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이 여행을 계획한 시점의 나는 마음이 아주 좁고 가난했어. 복잡하게 전개되는 삶의 양상을 덤덤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모든 안 좋은 일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았어. 당장 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 시간을 쉽게 폄하하고 내 가능성을 과소평가했어. 가만히 있는 것도 도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무리하게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제 발을 밟고 스텝이 꼬이기도 했어.
지금은 그때 나에게 고마워. 두렵고 불안했을 텐데도 딛고 선 공간을 최선을 다해 탐색했고, 힘든데도 바닥에 주저앉은 스스로를 계속 들여다봤어. 고민을 멈추지 않았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 여행을 계획했어. 그 여행이 지금 나에게 도착했어. 작고 가난한 과거의 내가 미래로 보낸 선물이 지금 내게 온 거야. 어떤 선물은 보낼 때는 선물이 아니었다가 도착해서야 선물이 돼.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또 고마워할 것 같아. 진짜 이 시간을 선물로 만드는 건 지금의 나일 테니까. 계속 선물을 잘 받아보려고 해. 또 쓸게. 모든 기쁜 순간에 애리 씨를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