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 긴 호흡
작년에 은유 작가님의 신작 <우리는 순수한 것들을 생각했다>를 읽고, 앞으로 시인과 시에 관심을 가져야지, 도서관에 갔을 때 시집을 한 권씩 빌려야지, 다짐했다. 과연 잘 실천했을까? 이전에는 둘러보지도 않았던 시가 코너 앞에 서서 시집을 꺼내 촤르르 넘겨보는 것까지는 성공. 관심을 기울여 읽는 것 실패. 대출해 오는 것 실패. 어떻게 하면 문학 작품을 좀 더 가까이 읽고 즐길 수 있을까, 새해에는 문학을 향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난감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강연 속에서 장동선 뇌과학자를 만났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사람이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환경을 새롭게 바꾸고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새로운 환경에 나를 노출시키자! 차일피일 미루던 마음산책 북클럽에 가입 신청서를 보내고 바로 입금했다.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신간을 받아 읽고 작가님을 초청하는 북토크 관련 활동에 적극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 처음 출판사 북클럽 회원이 되었다. 나 나름대로는 문학을 가까이하겠다는 강제성을 부여한 거랄까. 북클럽 회원이 된 걸 축하한다는 메일을 받고, 며칠 뒤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기대하며 뜯은 상자 안에는 '시집'이 다소곳하게 놓여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정적. 으아, 첫 도서가 시집이라니, 막막했다. 표지는 예쁘지만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은 누구신지 모르겠고, 시집을 펼쳐보니 왼쪽 면은 영어 시, 오른쪽 면은 한국어 시가 적혀 있었다. 첫 북토크는 이 시집을 가지고 진행된다고 하여, 꾸역꾸역 숙제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시를 읽었다.
요조 작가와 김소연 시인이 함께하는 북토크 당일, 저녁 7시 30분이 다가올수록 줌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다. 에잇 이렇게 할지 말지로 뇌 에너지를 쓸 바에야 일단 들어가고 별로면 나오자!라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예의상 딱 10분만 듣고 나오는 거다, 했던 다짐과 다르게 토크가 마치는 저녁 9시까지 깔깔거리고 웃다가, 진지하게 듣다가 그렇게 모든 시간을 참여했다.
시라는 게 굉장히 심오하고 모호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했다. 사실 어렵다는 말 뒤에 숨어 무언가 시도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촤르르르 책장을 넘기고 탁 덮곤 했으니까. 막막해하는 나에게 김소연 시인은 시는 이렇게 읽어볼 수 있어,라고 말을 걸듯 자신이 읽은 방식을 공유했고 나는 이를 통해 새로운 시 읽기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김소연 시인은 구체적으로 그 장면에 임하기 위해서 시를 읽다가 지명이나 꽃 이름, 동물 이름이 나오면 일단 멈추고 구글링을 해본다고 한다. 항공사진을 보며 이런 길을 걸으며 이 꽃을 봤겠구나, 내가 그 장면에 있는 것처럼 구체화를 한 뒤 시를 읽는다고 한다. 그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시 하나를 이해하기 위한 정성스러움에서 이미 차이가 났다.
또 시는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귀로 듣는 것임을 새롭게 알았다. 눈으로 쓱 훑으며 읽을 때는 시가 마음에 걸리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누군가 소리 내어 읽어주는 시를 들으니 연과 연 사이에 여백이 발생했다. 낭독하는 사람이 읽고 있는 시를 분명 나도 읽었는데, 처음 접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천천히 의미를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기억하고 싶은 시구에 플래그를 붙였다. 낭독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과연 이 시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각자 마음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어서 듣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각자에게 와닿은 시구가 다 다르고, 해석도 달랐다. 그게 오히려 더 좋았다. 서로 다른 생각이 모이니 시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혼자서 읽으면 몰랐을 시의 매력! (분명 읽지도 않았을 거다)
환경을 바꿨더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스스로 시를 읽으려고 공부하거나 노력했으면 분명 보이지 않았을 거다. 나만 시를 어렵게 느끼는 게 아니구나. 아하, 시는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다 이상한 나라를 발견한 것처럼,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들의 살롱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앞서 뇌과학자가 말했듯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강력한 힘은 의지보다 새로운 환경에 있을 수도?!
(24.2.3. 에 작성된 글을 이제야 서랍 속에서 꺼냄. 발행 버튼을 누르는 건 왜 이리 어려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