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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d Revolution May 18. 2018

낯선 별, 밴쿠버에 착륙하다

밴쿠버, 그리고 서울에서 보낸 500일

밴쿠버 공항은 붐볐다.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올라 탄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퍼스트 네이션’(캐나다에선 원주민 인디언들을 이렇게 부른다)들이 만든 대형 장승 조형물이 맨 먼저 우리 가족을 맞았다. 아내와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우주선에서 낯선 세상으로 천천히 착륙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비롯해 일본인과 중국인들 국적을 알 수 없는 좀 더 짙은 피부색의 아시안들이 뒤섞여 함께 하강하고 있었다. 아이들 손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긴장했겠지, 동시에 두 녀석은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 입국 심사대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은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고 마치 개미떼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빠, 여기 캐나다야? 밴쿠버야?”

“응, 이제 우리 도착했어. 이제 있다가 우리 밴쿠버 집에 갈 거야.”

“와, 캐나다 밴쿠버.”

여섯 살짜리 둘째는 오랜 비행에도 지치지 않은 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긴장한 것은 나였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공복감이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10시간 비행시간 내내 음료수 한 잔 하지 않았다. 평소 해외 출장을 갈 때는 와인 한 잔, 맥주 한 캔을 빠트리지 않았다. 어떤 통신 수단도 접근할 수 없는 비행시간이야말로 기자에게는 완벽한 휴식 시간이었다.

난생처음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탄 아이들은 미리 주문해둔 두 차례의 어린이용 기내식을 맛있게 먹어 치웠다. 한 번은 돈가스, 한 번은 오므라이스가 나왔다. 어른들에게는 예의 그 비빔밥 아니면 치킨 오어(or) 비프. 아무런 맛도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들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깬 뒤 도착해서 할 일 목록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그때서야 생각나는, 한국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들의 리스트까지 줄줄이 떠올라 복잡한 마음이 앞섰다. 음식이 제대로 목으로 넘어갈 리 없었다. 배가 고픈 줄도 잘 몰랐다. 아내도 비행하는 내내 잤다. 한국에서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듯 고개를 약간 젖히고 입을 반쯤 벌린 채 잠든 아내 모습이 문득 측은하면서 예뻤다. 처녀 시절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빛보다 더 어른스러운 여성이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 혼자 캐나다에서 한동안 지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이들의 학교와 학원, 그리고 이웃에 다양한 해외 생활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아내는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불안해했다. 비단 영어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 세상에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아이 인생에서 큰 선물 하나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했다. 그러나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대출 통장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무한 도전’(무모한 도전)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공항에는 딱 이틀 동안 우리 가족의 현지 정착을 돕기 위해 누군가 나올 예정이었다. 낯선 세계에 만들어 둔 유일한 끈. 한국 유학원에서 미리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문득 초조했다. 물론 그로서는 일찌감치 나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입국 수속에, 비자까지 받아서 공항을 나서려면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도 없었다.

우리 역시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S자로 몇 번을 구부러진 대열의 맨 뒤에 다. 인도와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곳곳에서 도착한 사람들이 입국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 바로 앞에는 우리보다 짙은 피부에 콧대가 높고 곱슬머리에 진한 눈썹을 가진 젊은 남녀 수십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손에 서류를 잔뜩 들고 긴장한 표정이었다. 인도인들, 그 젊은이들은 아마도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온 것일 터였다. 캐나다 이민자 중 가장 많은 나라고 중국인들이고 그다음이 인도인이다. 그러고 보니, 중국인들은 명품 구두와 가방에 금장 시계를 차 한 눈에도 부유해 보이는 관광객이 많았고,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 중에는 아이 한두 명씩을 데려 온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줄이 점점 짧아졌다. 벌써 한 시간 이상 지난 뒤였다. 작년 5월 캐나다 동부 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밴쿠버에 도착해 국내선으로 갈아탈 때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금발머리의 통통한 국경 경찰(Border Police)이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조금 영어를 더듬거리는 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유 해브 콜리그?” 내가 대답했다. “예스, 오버 데어….” “고 데어, 넥스트.”

당시 생각을 하며 무슨 말을 할지 속으로 되뇌는 사이 내 차례가 됐다. 아이들과 아내를 한꺼번에 데리고 입국 심사대 앞에 섰다. 이번에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서 있었다.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포 스터디?” “예스, 원 이어. 아일 고백 넥스트 위크.” 그리고선 꽝 꽝 도장 찍고 끝. “친절하게 이민국 사무실 방향을 손짓으로 가르쳐주면서 아내와 아이들은 그곳에서 별도의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안내까지 해줬다.

밴쿠버 공항에선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바로 짐을 찾을 수 있었다. 1인당 두 개씩, 모두 8개나 되는 대형 이민 가방에 앞으로 1년 동안 가족들이 입을 옷가지와 각종 생필품이 그득 찼다. 바이올린은 휴대품으로 들고 비행기에 탔고,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도 직접 자기 짐을 쌌다. 서울 집에서부터 등에 매고 온 가방에는 아이언맨 피규어와 그림책 한 권, 딱지 십 여 장이 들어있었다. 아이에겐 세상 그 어떤 물건보다 소중한 보물일 터였다. 큰 녀석은 장난감 총을 소중하게 챙겨서 왔는데, 그만 인천공항에서 탑승 심사를 받다가 걸려서 기내에 반입을 하지 못했다. 너프건(Nerf Gun)으로 불리는 스펀지 총알을 넣어서 쏘는 장난감인데 아이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총알까지 별도로 한 박스를 싸서 차곡차곡 넣어 뒀건만 공항에 버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인천 공항에서 아무리 사정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시간은 다가오고 초조한 마음에 결국 총을 포기했다.

공항 카트에 짐을 다 실었다고 느긋하게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입국 심사대 직원이 굳이 이민국 사무실 위치까지 알려준 것은 이유가 있었다. 30분 가까이 기다려 이민 가방 8개를 모두 찾아 바로 옆 이민국 사무실로 들어가니, 아뿔싸 그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났던 인도 젊은이들이 수십 명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들이닥쳐 줄을 서 있었다. 이들은 모두 취업 비자를 받아야 하는 처지. 취업 비자는 우리 같은 일반 유학 비자에 비해 훨씬 시간이 오래 걸렸다. 유학원 현지 직원은 이럴 줄 알고 한 시간쯤 늦게 나왔는데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았다. 더디게 움직이는 줄 틈에 우두커니 우리 가족은 서 있었다. 유학원 직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고 했다. 그렇게 밴쿠버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끝내고 이민국 사무실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이 묘한 평온감을 주기도 했다. 아내와 마주 보며 처음으로 “이제 왔네, 진짜로” 이렇게 이야기하며 잠시 웃었다. 캐나다로의 임시 이주를 생각하며 분주하게 준비하는 사이 둘이서 그렇게 웃었던 것은 몇 달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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