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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d Revolution Apr 08. 2020

아이들의 더 큰 세계를 위하여

우리 머리 속 세상의 크기

밴쿠버 공항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한국에서의 기억은 빠른 속도로 잊혔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50년 가까이 살아온, 태평양 건너 땅에서의 일들이 먼 별에서 있었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처리해야 하거나 돌아가서 다뤄야 할 일들이 머릿속 회로 속으로 진입하는 우선순위에서 한 없이 밀려났다. 대신 그 자리로 새로운 일상(日常)이 쉴 새 없이 밀어닥쳤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자극에 확실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관광이나 출장을 위해 해외여행을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센서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시각과 청각, 후각 그리고 눈에 띠지 않는 미묘한 변화라도 알아챌 수 있도록 온몸의 감각기관을 열어 놓아야 했다. 관광객처럼 새로운 것에 놀라고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도 없는 처지. 이방인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발견의 의미를 파악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가늠해야 했다. 마치 내 몸에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 기관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 몸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온 몸의 센서들이 무의식적으로 24시간 풀(full) 가동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늦게 잠들고 새벽에 깨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차(時差) 적응의 어려움을 호소할 필요도 없었다.

아내와 함께 머무는 2주 동안 매일 운전연습을 반복했다. 나중에 아내가 혼자 다니게 될 길들을 하루에 몇 번씩 예행연습했다. 아이들이 입학한 지역 사립 초등학교에는 스쿨버스가 없었다. 아침 8시 반까지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 3시 반에 데리고 와야 한다. 가는데 10분, 오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걸어서 가려면 30분은 족히 넘게 걸리는 곳이다. 학교 앞엔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엄마 아빠들이 서 있었다. 백인은 백인들끼리, 아시안은 아시안끼리 주로 모여 있었다. 흑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가톨릭 교구에 부속된 초등학교였다. 둘째는 반년을 유치원 다니고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셈이었다. 성당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고, 2층 건물로 이뤄진 학교 출입구 로비에는 성모상이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바지 정장, 여자 아이들은 치마 정장을 입는 것이 원칙. 첫날, 크리스마스 휴가에서 개학도 하지 않은 학교를 찾아가 등록을 한 뒤 교복을 걱정하자, 한 중국계 학부모 자원봉사자가 나와 우리를 학교 체육관에 딸린 창고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온갖 사이즈의 교복 바지와 셔츠가 있었다. 학교에서 운동할 때 입는 셔츠도 있었다. 개당 2달러에 팔고 있었다. 우리처럼 학교에 입학할 때 신입생들이 맞추는 교복이 거대한 비즈니스로 연결될 일은 없었다. 반면, 이곳에선 학교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선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한국은 아주 기초적인 단위인 골목에서부터 공동체가 무너져 있다. 비록 남의 나라에서 겪는 일이지만, 아이들이 지역 공동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밴쿠버 인근의 모든 지역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서 그런지, 인구 구성에서 백인 농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서 그런지 옛 축제와 지역 문화를 중시하는 문화가 남아 있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학교 체육 행사에서부터 핼러윈 데이, 지역 축제까지 마음껏 즐기고 맛보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학교 왕복 연습이 끝나고 나면, 장을 보러 다니는 연습을 해야 했다. 한국에서 집을 계약할 대 구글어스를 제대로 활용했다.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런던 드럭’ ‘세이프웨이’ 등 대형 마트와 1달러 샵 등이 모인 마켓이 모여 있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걸어갔다가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대신 가끔씩 가야 하는 월마트와 이케아 등이 문제였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미국 시애틀과 밴쿠버를 잇는 97번 국도를 잠시 타고 가야 했다. 국경을 향해 달리는 차량들은 어느 나라나 속도를 늦추지 않는 법이다. 아내가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해서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루는 코스트코, 하루는 이케아, 다음날 또 이케아 이렇게 내가 조수석에 앉아 아내의 운전을 모니터링하고 운전습관을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줬다. 의외로 아내는 잘 적응했다. 20년 장롱면허도 무사고는 무사고인 셈이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내는 이 실력으로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미국 워싱턴주의 작은 도시들을 여행하기도 했다.

코퀴틀람의 한인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던 늦은 오후였다. 시애틀이라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나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 길은 시애틀을 너머 캘리포니아로 LA로 멕시코로, 다시 칠레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다. 사실 어디에 살아도, 길에 대해선 이 정도 명상은 펼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럽이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폴 써로우의 중국 기행도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살면서도 섬처럼 살아왔다. 이런 인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큰 상실이다. 만약 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올 때 처음 보았던 고속도로 표지판에 서울, 평양 베이징, 프랑크푸르트 같은 연결된 주요 도시들의 이름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 길을 한껏 달려가는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분단의 현실이 우리 머릿속의 지도를 축소시켜버렸고, 그렇게 세대를 거듭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무리 달려도 국경 밖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대는 유럽에선 냉전 종식과 함께 이미 끝났는데, 우리는 냉전의 부산물인 남북 분단의 피해를 아직까지 입고 있다. 북한에 인프라를 우리가 다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도로와 철도를 놓고 이 인위적인 섬 상태에서 남한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향후 상상력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번 밴쿠버 이주는 영어도 영어지만, 아이들의 상상력을 넓혀 놓을 것이다. 상상력의 범위가 큰 아이들로 키우기 위한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결혼 초 아직 큰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 “여덟 살쯤 전혀 다른 외모에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보는 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수준을 다르게 해 준다”는 말을 읽고서 아내에게 해줬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시절, 살았던 영도의 슬래브집 옥상에 앉아 수평선 너머로 지는 태양과 노을을 바라보며, ‘저 바다 건너가 미국이겠지’ 정도의 인식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 둘째는 그 나이에 백인 흑인 아시안이 뒤섞인 대도시 학교를 다니고 누구라도 만나서 척척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았나, 아이들 머릿속 세계의 크기가 나보다 훨씬 커졌다는 점에서 우리 이주 작전은 대성공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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