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국 사무실에서 살아남는 법
미끄러질까봐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선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반쯤은 얼어 있는 눈이 쌓인 보도 위로 내려서자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짙은 감색과 검은 색 오리털 파커를 두툼하게 입고 하얀 색 머플러를 목에 두른 아이들은 펭귄 같았다. 앞으로 1년 반 동안 아내와 아이들이 살 집 앞. 아내는 차에서 내려 초인종이 잘 작동하는지 빈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행여 한 녀석이라도 얼어붙은 길 위로 미끄러질까봐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다.
4층짜리 콘도는 마음에 들었다. 별도 경비원은 없었지만, 현관문과 주차장 모두 열쇠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콘도를 관리하는 회사에선 각 가구별 개인 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초인종용으로 실제 거주하는 호실과 다른 별도의 호실 번호가 부여돼 있었다. 예컨대 우리가 사는 집은 410호인데, 현관에는 503호로 돼 있었고, 이름도 가명으로 기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마음 놓고 한국으로 돌아가도 좋을 만큼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추웠다. 온 가족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첫날밤을 보냈다. 제대로 된 침구도 없이 이민 가방에 넣어온 가족 숫자만큼의 담요를 덮어 썼다. 덕분에 아이들과 아내와 나는 서로의 몸을 붙여 추위를 녹였다. 난방 시스템은 한국과 완전히 달랐다. 온돌 같은 바닥 난방은 언감생심. 전기 라디에이터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은 가구도 없어 휑한 집안 공기를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전기요금이 얼마나 나올지 감을 잡을 수 없어, 한 시간 틀다가 끄고 또 한 시간 틀다가 끄고를 반복했다. 시차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것인지 추워서 잠이 안 오는 것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낯선 환경이 즐거운 듯 이것저것 구경 하느라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여기에 나머지 가족들을 모두 떨궈 놓고 돌아가야 하는 아빠의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씩씩한 아들들…후~.
다음날 아침 딱 사흘 동안 우리의 정착을 도와주기로 한 이경훈(가명)씨가 왔다. 그나마 하루는 공항에서 수속이 늦어진데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라 어디 갈 데도 없어 이미 날린 터였다. 맨 먼저 한 일은 아이들이 앞으로 1년 동안 다닐 학교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이미 한국에서부터 구글 어스로 혼자서 수십 번을 오갔던 길이지만, 실제로 얼마나 걸리는지 아내가 매일 아침 데려다주는데 불편함은 없을지 체크해야 했다. 학교는 무척 가까웠다. 우리가 살게 될 집에서 승용차로 10분도 안 걸렸다. 1월2일 개학 때까지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어서 학생들은 없었다.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회원 등록을 하려고 했는데 그곳도 아직은 오픈 전이었다. 결국 개학 한 뒤에 나중에 우리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남은 것은 자동차 구입과 보험 가입, 운전면허증 발급이었다. 일단 자동차 숍에 가서 한국에서 미리 찜해 두고 온 닛산 의 상태를 확인하고, 잔금을 치렀다. 그리고 서리에 있는 ICBC라고 하는 자동차 운전자보험 등록기관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아야 했다. 사단은 여기서 났다. 크리스마스 다음다음 날인데도 운전면허증 발급이나 갱신을 위해 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리는 인도인과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그런지, 대부분 아시아인들이었다. 금발의 젊은 여성이 오히려 눈에 띨 정도였다. 한 시간쯤 줄 서서 기다리다가 금발의 여직원에게 서류를 내밀었는데, 아뿔싸 아내의 비자 서류에 퍼스트 네임과 패밀리 네임이 바꾸어 있었다. 성(姓) 대신 이름을, 이름 대신 성을 써 놓은 것을 미처 못 본 것이었다. 전 날 이민국 직원이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서류를 주면서 틀린 것 없냐고 했을 때 너무나도 당당하게 ‘노 프로블럼’이라고 대답했던 내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할 일이 태산인데 번거로운 일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이곳 직원은 “여권과 비자 서류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서류로는 어떤 증명서도 떼 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다시 이민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공항까지 눈길을 다시 한 번 헤치고 나갔다. 이번에도 이민국 사무실에서 세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처음 밴쿠버에 들어올 때 들렀던 입국장 쪽 사무실과 달리 이곳은 한산했다. 세 팀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카운터 너머에는 중국계로 보이는 아시안 네 명이 일하고 있었다. 누구도 한국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사정을 이야기한 뒤 우리를 불러주기를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는 우리 보다 먼저 와 있는 20대 한국 여성도 있었다. 그는 입국 목적이 문제였다. 이경훈씨는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나 유학 비자로 입국해 미국으로 들어가서 매춘을 하다가 적발된 아시아 여성들이 있어서 최근 심사가 까다로워졌다고 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앉아서 몸을 뒤틀었다. 둘째는 연신 “언제 가?” 물었다. 아내는 낙심한 듯 자책하는 듯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둘 다 눈에 뭐가 씌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라는 거야, 너무 낙심하지마.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 하지 말라고 액땜하는 셈 치면 돼.” 내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일단 내가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팀홀튼’(캐나다의 스타벅스에 해당하는 커피 전문점)에 커피와 음료,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음식이 나올 때 쯤 되어서 큰 녀석에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고 다시 사무실을 찾아가 내가 대신 기다릴 테니 가서 요기를 하라고 했다. 아침 식사로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햇반과 김치에 김을 싸서 먹고 나와 온종일 차가운 바람을 맞고 돌아다니느라 아내는 벌써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당신 좋아하는 차우더도 주문 해놓았으니까 가서 몸부터 좀 녹여”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경훈씨와 함께 간이식당으로 가고, 나 혼자서 이민국 데스크 너머를 지켜보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매춘 의심을 받던 한국 여대생은 별도로 분리된 인터뷰 룸으로 불려 들어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우리 가족도 저 안에 들어가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떤 곤욕을 치러야 할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두 시간 넘게 기다렸을 때쯤인가. 아까부터 몇 차례 드나들며 중국계로 보이는 이민 2세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농담도 나누던 젊은 여자 직원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두리번거리며 나를 보더니, “많이 기다리셨죠.”라고 말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랬더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다른 남자 직원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아마도 서류를 직접 작성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내를 데려와야 했다. 내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지금 식사를 하고 있는데 금방 불러 오겠다고 하니까, 그는 알았다면서 자기는 그러면 안에 들어가 있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서류를 맡기고 나는 아내를 데려왔다. 정말 30초 만에 아내를 데리고 왔는데 그 사이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아,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하나, 공항 간이식당에 혼자 남겨진 아이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인도계 남자가 나올 테니 무조건 기다리라고 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아내가 먹다 만 차갑게 식은 차우더와 샌드위치를 내가 대신 먹었고, 아이들 손을 잡고서 얌전히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다행히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는 검역 업무에 종사하는지 검은 색 얇은 비닐 장갑을 낀 손 그대로 아내를 부른 뒤 여권과 비자를 대조하고, 이름이 틀린 것에 대해 이것만 정정해주면 되냐고 물은 뒤 들어가서 불과 10여 분만에 서류를 바꿔서 나왔다.
10분이면 될 일을 세 시간 가까이 사람을 기다리게 한 것은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 더구나 한국말을 할 줄 알면서 계속 드나들며 우리가 뭐라고 하는지 듣고 있었을 그 한국계 직원도 야속했다. 하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일은 아마도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닐 것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캐나다에서 미국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