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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한마음 Apr 14. 2023

엄마와 다육이

2021. 계간 <시에> 수필 등단작

  올여름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오래간만에 햇살이 환해 창가의 다육이도 눈부시다. 12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와 생활한 지도 벌써 7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타지에서 학교와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다. 동시에 중국 국제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남편을 따라 칭다오로 갔다. 부모님께는 “저 멀리 간다 생각 마시고 유학 간다고 생각해 주세요.”라며 호언장담했다. 결혼과 동시에 낯선 땅에 가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가족들, 친구들과 헤어지고 직장도 그만두고 떠났으니 새로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좋은 분들의 도움도 받고 어학당 본토 대학생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칭다오에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며 순조롭게 정착하는 듯했다.


  2020년 연 초에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출국하지 못했다. 코로나19가 덜컥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임신 중이라 출산을 위해 남고 학교 개학을 앞둔 남편 혼자 간신히 출국했다. 뒤이어 중국으로 가는 하늘길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모든 외국인은 중국 입국이 봉쇄된 것이다. 4월 말,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남편은 전화 통화로 아기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기는 자신의 이름이 생긴 걸 알았을까. 신기하게도 그날 밤부터 진통이 시작됐다. 엄마와 나는 잠도 못 자고 끼니도 거른 채 꼬박 이틀 밤을 새웠다. 대낮이 되어서야 때가 되었는지 급히 도착한 의사는 나와 엄마를 힐끔 보며 물었다. 남편은 어째 안 보이냐고. 사정을 미리 들은 간호사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조심스레 아기 탯줄을 잘라주고는 눈물을 훔쳤다. 품에 안긴 아기 얼굴을 보며 고생했다고 말을 건넸다. 신기하게도 아기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울음을 딱 그쳤다. 전화가 어렵게 연결된 남편도 울먹였다.


  태어난 아기를 보기 위해 하루 두 번 시간에 맞춰 면회실로 갔다. 코로나19로 면회도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엄마가 아기를 보다가 먼저 조용히 입원실에 들어가셨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다들 아기 엄마 아빠가 와서 보는데 우리만 엄마랑 할머니가 봐서 애기한테 좀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리원에 가지 말고 집으로 가자고 입을 떼셨다. 그동안 못해준 게 많은데 이렇게라도 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며 우리 잘 맞춰서 해보자고 하셨다. 기뻤다. 이미 남편과도 떨어져 있는데 병원에서 퇴원하고 조리원으로 가면 코로나19로 아기도 품에 두지 못할  게 뻔했다. 엄마의 배려 덕분에 나는 아기를 안고 병원에서 바로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창 너머 잿빛 하늘엔 무지개가 커다랗게 떠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이 하던 일도 뒤로 젖혀놓고 나의 산바라지를 시작하셨다. 엄마는 아기를 안으며 어디서 이렇게 이쁜 아기가 왔냐며 연신 웃으셨다. 손주는 전생에 애인이라며 지친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다. 다 큰 딸에 손주까지 돌보게 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하루는 내가 어릴 적부터 쓰던 방에 곤히 잠든 아기를 눕히고 엄마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미역국 한술 뜨려고 수저를 들었는데 벌컥 눈물이 나왔다. 아기를 낳고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잠을 자다 새벽에 몇 번씩 깨서 수유하니 늘 비몽사몽이었다. 아기가 울 때면 되레 나의 서투름 때문인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있으니 얼른 눈물을 훔쳤다.


  “아이고, 니가 우니까 나도 눈물 난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엄마는 뭐 그냥 되나?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엄마의 울음참는 다독임에 나는 그냥 어린아이가 되어 더 크게 꺼이꺼이 울었다.  


  아기는 벌써 백일이 훌쩍 지났다. 아기를 안고 볕이 드는 베란다로 간다. 창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다육이들이 반짝인다. 아기는 호기심에 다육이를 만지작거리는데 잎 하나가 톡 떨어졌다. 떨어진 잎을 주워 흙 위에 가지런히 얹어놓았다.



친정에서 키우는 다육이가 꽃이 폈다.


  다육이는 잎이 떨어져도 새롭게 자란다. 본래 비가 내려야 살아 있는 것들이 자라는 것 아닌가. 물이 있어야 식물이든 사람이든 목마름을 축이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 다육이는 사막과 해안의 건조지대에서 자라왔다. 그저 잠깐 내리는 서리와 이슬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잎을 활짝 열어서 말이다. 다육이가 다육이로 자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진 환경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물을 저장하며 사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내 삶의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때다. 내게 주어진 삶의 눈물마저 가슴 깊이 모으고 싶다. 주어진 물이 없어도 내 안에서 나온 이 생명을 꼭 안아 나도 함께 자랄 테다. 떨어진 잎으로도 촉을 틔우고 뿌리를 깊이 내리는 다육이처럼. 늘 온몸으로 자식을 품는 엄마처럼.  

  멀리서 나와 같이 견디며 눈물을 머금고 있을 남편에게 영상통화 버튼을 꾹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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