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주익 언덕에서 이상형을 만나다.

몬주익언덕(몬주익캐슬)-황영조동상(올림픽 주경기장)- 바르셀로나 대성당

by 옥상평상

몬주익 언덕에서 이상형을 만나다.

몬주익언덕(몬주익캐슬)-황영조동상(올림픽 주경기장)- 바르셀로나 대성당(고딕지구)




11살 일기

혁우는 변덕쟁이다. 어제는 아그네스 누나가 좋다더니 오늘은 또 다른 여자아이가 좋다고 한다. 내 동생이지만 정말 어이가 없다.

9살 일기

오늘 내 이상형을 만났다. 아그네스 누나에게 미안하다.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몬 주익은 ‘유대인의 산’이라는 뜻이다. 언덕에 올라서면 지중해 바다와 바르셀로나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멋진 장소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은 보통 ‘꽃보다 할배’의 할아버지들처럼 바닷가 쪽에서 ‘텔레 페리코’라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하지만 이미 케이블 카 값을 ‘폴라포’와 이름이 비슷한 ‘칼리포’ 얼음과자에 지불한 우리는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가기로 했다.


해발 213미터에 불과한 몬 주익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 그라나다의 산 니콜라스 전망대 정도의 난이도로 생각했던 나는 걷는 내내 케이블카를 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생각해 보니 ‘꽃보다 할배’의 주인공들 역시 이 언덕에서 많이 힘들어했던 게 떠올랐다. 게다가 우리들은 숙소가 있는 카탈루냐 광장에서부터 줄곧 걸어온 상태였다.


칼리포를 입에 물고서 신나게 오르던 아이들 역시 칼리포를 다 먹어치우고는 약발이 다했는지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

“얘들아, 놀이터다.”

“와! 그네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놀이터로 달려갔다. 형제들은 먼저 놀고 있던 현지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그네와 미끄럼틀을 탔다. 혹시나 스페인 아이들과 충돌하는 일이 있을까 싶어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아이들에게는 인종이나 국적의 벽이 어른들처럼 높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페인에서 그네를 타는 것은 이제 마지막일 듯

미라마르(MIRA MAR)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에 들렀던 론다 전망대를 의미하는 '론다 데 미라도르 (RONDA DE MIRA DOR)'에서처럼 ‘미라’라는 의미는 ‘보다’는 뜻이고 ‘마르’라는 의미는 ‘바다’라는 뜻이다. 영어의 거울을 뜻하는 ‘MIRROR'과 바다를 뜻하는 ’MARINE'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또한, ‘미라도르’의 ‘도르(DOR)’는 ‘땅’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어둠의 땅’의 의미로 ‘모르도르’를, ‘돌의 땅’의 의미로 ‘곤도르’를 사용했다. 즉, ‘미라마르’는 바다 전망대고 ‘미라도르’는 육지 전망대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미라마르 호텔 앞 광장에서 포트벨 항구와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지중해 바다의 파란 빛깔과 항구의 하얀색의 선명한 대조는 네르하 바다와 비슷했지만 항구의 크기 때문인지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바르셀로나 포트벨 항구

“아빠, 왜 우리는 케이블카를 안타요?”

“아빠, 저거 타고 싶어요.”

아이들이 머리 위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케이블카를 바라보며 불만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긴 이미 지칠 때가 되긴 했다.

“조금만 참고 가자.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아마도 이번 여행 중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뱉은 말이리라.

케이블카를 타고 온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분수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30분까지 모이라고 했으니 빨리 찍자구.”

“그러게. 여기서 빨리 찍고 저쪽 바다에서도 한 번 더 찍자고.”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

이 먼 곳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렵게 기회를 얻어 모처럼 쉬러 온 여행에서 그들은 다시 한국에서 일을 하는 것처럼 관광을 하고 있었다. 물론 한정된 시간과 비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너무 분주한 그들의 모습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하긴,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오며 익혀온 방식을 여행 한 번 왔다고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일 터였다.


"혁우 엄마, 빨리 찍고 어서 가서 또 찍자구."
"알겠어, 일우 엄마."


어느새 형제들은 방금 전의 관광객들을 흉내 내며 사진 찍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단지 놀이일 뿐이지만 나중에는 형제들에게도 엄연한 현실로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짐짓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드디어 언덕의 정상에 위치한 몬 주익 성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야 할지 내부 입장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안내문에 어린이 입장료가 무료라고 적혀있는 것을 본 나는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성 내부로 잡아끌었다.


"아.. 아빠, 배고프단 말이에욧!"

"미... 미안, 아빠가 여기만 보고 식당 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고 했던가?


방어를 위한 구조물인 해자를 건너 입구로 들어서니 양 갈래로 나뉘는 길을 만났다. 아마도 내가 이 성을 침입한 적군이었다면 바로 이곳에서, 양쪽 성벽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이나 총알을 맞고 즉사했을 것이었다. 소소한 상상에 괜스레 등골이 오싹해졌다.

몬 주익 성은 네모반듯한 형태의 제법 커다란 규모의 요새였다. 훈련을 위한 연병장은 수 백 명의 병사들의 훈련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바다를 향해 설치된 현대식 대포의 육중한 모습은 최근까지도 이곳이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들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사용되어 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전망 또한 훌륭했다. 남쪽으로는 지중해 바다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고 북쪽으로는 ‘바르셀로나 대성당’과 ‘성가족 성당’이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었다. 아까 본 ‘미라마르 전망대’의 전망보다 훨씬 더 시원한 광경이었다. 내부 입장을 안 하고 지나갔다면 자칫 후회할 뻔했다.

우리는 몬주익 성을 지키는 요원들!!

몬주익 성으로부터 내려가는 길에서 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바르셀로나 스타디움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88 서울 올림픽 바로 다음에 열린 올림픽이라 관심 있게 지켜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올림픽 주경기장 앞에 있는 황영조 동상에 섰다. 동상이란 이야기에 분명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 환조를 상상했는데 넓고 평평한 돌덩이에 새긴 부조 형태였다. 예상에 못 미치는 규모와 형태가 솔직히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도 아닌 머나먼 타국 아닌가? 이런 정도의 기념물로라도 우리 선수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고쳐먹고 감사함을 느끼기로 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타디움 앞에 있는 황영조 동상

지도를 따라 시내로 내려가다 작은 골목길을 만났다. 집 앞에 나와서 좌판을 벌이고 있던 아이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천사같이 예쁘게 생긴 자매였다. 못 알아듣는 스페인 말이지만 좌판에 놓인 물건 중 무언가를 고르라는 건 그네들의 표정과 몸짓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낯선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던 형제들은 그녀들이 재촉하자 물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우가 기차모양의 낡은 볼펜 하나를, 혁우는 축구선수가 그려진 카드 두 장을 골랐다. 귀엽게 생긴 동생이 혁우가 쥔 카드를 보며 웃으며 무어라 이야기했다. 아마 좋은 물건을 잘 골랐다는 뜻인 거 같았다. 그 모습이 당돌하면서 깜찍했다. 나는 형제에게 각자 1 유로씩을 쥐어주며 물건 값을 주라고 했다. 자매 옆에서 지켜보던 아빠는 괜찮다며 돈을 거절했지만 내가 웃으며 부탁을 하자 못이기는 척 받아줬다. 뜻하지 않게 돈을 받은 자매들이 무척이나 기뻐했다. 즐거워하는 자매들의 모습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자매들과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일우가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아빠, 혁우가 자기 이상형을 발견했대요.”

“말하지 마. 형!”

“누군데?”

“그 동생 있잖아요.”

“말하지 말라니깐!”

“히히 나중에 그 동생이랑 결혼하고 싶대요.”

혁우가 형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 아빠가 봐도 동생 정말 예쁘더라.”

내 얘기를 듣던 혁우가 형의 목을 감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근데 걔가 널 좋아할까?”

“형!”

‘톰과 제리’ 마냥 쫓고 쫓기는 형제들의 목소리가 고요한 몬 주익 마을에 울려 퍼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