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식당에서 술자리를 갖는지 우리 방 투숙객 몇 명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에 도통 잠이 들 수 없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자려니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진 모양이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까닭에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부엌에 나가 물을 한 컵 먹는데 공동 부엌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요리 준비가 한창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파프리카 같은 야채를 송송 썰어 간단히 볶고는 그걸 접시에 담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는 셰프처럼 폼나 보였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내 주린 배를 심하게 자극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내에게서 요리하는 법이라도 배우고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그네스에게 이야기를 해 자물쇠를 하나 더 얻었다. 그녀 역시 잠을 못 잤는지 눈이 부어있었다. 물론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일하느라 잠을 안 잔 것일 터였다. 침대 밑 대형 서랍 두 개에 짐을 모두 집어넣고 각각 자물쇠를 채웠더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호텔과 다르게 호스텔의 도미토리 객실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방을 사용해야 했던 까닭에, 짐 보관에서부터 먹는 것, 옷 입는 것, 씻는 것까지 신경 쓸 것이 많았다. 특히, 공동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을 챙기기도 해야 했지만, 반대로 그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해야 했다. 호스텔에 묵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다소 도움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꽤나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다. 길을 나서기 위해 아이들을 깨웠다. 아이들은 대충 씻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아침부터 공용 컴퓨터에 달라붙어 게임부터 시작했다.
"삼십 분에는 나갈 거야."
"한 시간 안돼요?"
"십오 분으로 할까?"
"알았어요. 삼십 분."
점점 협박에 능숙해지는 나였다.
숙소 근처 빵집에서 갓 구운 빵과 커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바르셀로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카탈루냐 광장까지 걸어갔다. 일요일의 바르셀로나 시내는 축제라도 하는지 잔뜩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알고 보니 마라톤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휴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이 흥겨운 난타 공연으로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활기 넘치는 공연과 마라톤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열기가 도시 전체를 축제공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공연과 응원을 진심으로 즐기는 학생과 시민들의 얼굴 하나하나에 생기가 넘쳤다.
마라톤 응원을 즐기는 학생들
“아빠 나도 저런 공연하고 싶어요.”
“야 저런 건 너 같이 어린애들은 못해.”
“왜? 그럼 형은 할 수 있어?”
“물론이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면서 형 노릇은 톡톡히 하려는 일우였다.
‘달과 육 펜스’의 작가 서머셋 모옴이 ‘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는 거리’라고 칭송했다던 람블라스 거리에 들어섰다. '람블라스(Ramblas)'의 뜻은 아랍어로 '강바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 거리의 바닥 무늬는 모두 물결 모양이었다. 거리에 늘어선 가게 앞에 놓인 형형색색의 꽃들과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동화 속 세상 어딘가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우울한 사람조차 이 흥겹고 화사한 거리를 걸으면 금세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신선한 채소와 다양한 먹거리로 유명한 보케리아 시장과 바르셀로나 최고의 오페라 극장이라는 리세우 극장을 뒤로하고 콜럼버스 탑이 있는 ‘포르탈 데 라 파우’ 광장에 도착했다. 도중에 가우디의 작품으로 유명한 구엘 저택이 있었지만, 가이드 투어를 예약했던 터라 그때 보기로 했다.
물결무늬 바닥의 람블라스 거리
시원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장에는 마라톤을 응원하러 나온 바르셀로나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광장 한쪽에서는 운동하러 나온 시민들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무대 위 근육질 강사의 춤 동작을 즐겁게 따라 하고 있었다. 광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휴일 아침 바르셀로나의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콜럼버스 탑에는 아름다운 바다와 바르셀로나 시내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하지만 주머니가 얇은 대신 두 다리가 튼튼했던 우리 삼부자는 몬 주익 언덕에 올라가 그 풍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몬 주익 언덕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형제들이 바다 쪽으로 갑자기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