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선물을 받을 때는 좋았는데 바로 욕을 들으니 기분이 안 좋았다.
9살 일기
프랑스 악당을 봤다. 태권도로 혼내 주려고 했는데 아빠가 도망가기에 나도 함께 도망갔다.
부처님이 아이들과 여행했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지인 ‘생장피드포르’으로 가는 날이다. ‘생장피드포르’는 산티아고 순례 길의 여러 루트 중 ‘프랑스 길’의 출발지인 곳이다. 인근에는 ‘시부르’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곳은 우리에게 ‘볼레로’라는 음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태어난 곳이다. ‘볼레로’에서 투우사의 등장음악 같은 스페인풍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은 그가 스페인과 가까운 이곳에서 바스크족 엄마에게 태어난 것과 서로 무관하지 않을 듯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겼다. 숙소를 이동하는 첫날이라 두고 가는 짐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아이들에게는 다시 돌아오기 힘드니 장난감을 두고 가면 안 된다고 몇 차례나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말이 화근이 되었을까?
결국 장난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출발시간이 임박해서야 알아차린 혁우는 짜증을 내며 쉬지 않고 울어댔다. 침대 밑을 몇 번이나 뒤지고 침대커버를 몇 번이나 들춰봤지만 장난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혁우가 그다지 아끼는 장난감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혁우의 고집 때문에 1박을 더해서라도 장난감을 찾아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혁우는 계속 칭얼댔고 참다못한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시무룩한 혁우와 내 눈치를 보는 일우를 보고 있노라니 여기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라면 나와 달랐을까?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는 장난감을 잃어버렸는지 몰랐다
지도를 통해 미리 몽파르나스 기차역까지 동선을 파악해 두었건만 막상 몽파르나스 지하철역에서 기차역으로 가는 길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동명의 지하철역과 기차역이면 당연히 환승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점이 실수였다. 낮은 파리의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몽파르나스 타워만 보고 찾아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다행히도 잠시 후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가는 여행자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니 곧바로 몽파르나스 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의 피곤한 일정과 내 핀잔에도 군소리 하나 없이 자기 몸만 한 배낭을 둘러 맨 체 씩씩하게 따라오고 있는 형제를 보니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드넓은 프랑스 들판을 4시간이 넘게 달려 도착한 바욘은 생각보다 더 시골스러운 동네였다. 생장으로 가기 위해선 이곳 바욘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하지만, 열차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에는 기차 대신 버스가 표시되어 있었다. 손님이 많이 없는 경우, 기차 대신 버스가 운행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역사를 빠져나와 광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버스 승강장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인포메이션 창구도 비어 있어 물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역 주위를 한 바퀴 살펴보고 오자 인포메이션 센터 직원이 돌아와 있었다. 잔뜩 불안한 얼굴로 묻는 내게 그가 온화한 표정으로 광장 왼편에 서 있으면 버스를 탈 수 있을 거라고 안내를 해줬다. 그가 알려준 내용은 간단했지만 그 분위기나 태도는 내가 프랑스에서 접했던 친절 중 최고의 것이었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그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습이 부러웠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의 내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버스 출발 시간은 여섯 시 무렵이었다. 남은 두 시간을 역사 안에서만 기다리는 것이 무료할 것 같아 바욘 시내 관광에 나섰다. 무거운 배낭의 어깨끈이 어깨를 조여왔지만, 순례 길의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며 힘을 내어 걸었다. 아이들은 순례길 비상식량으로 챙겨 온 초코바들을 벌써부터 한 개 두 개 까먹고 있었다. 이렇게 먹다가는 순례길 시작 전에 전부 바닥날 게 뻔했다. 바욘 시내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리 앞 벤치에 짐을 놓고는 잠시 강바람을 쐬었다. 옆 벤치에서 개를 데리고 쉬고 있던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요.”
“아이들이 귀엽네요. 이거 받아요.”
녹색과 하얀색과 빨간색의 실이 뭉쳐져 이탈리아 국기처럼 보이는 실타래였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선물을 받자 무척 기뻐했다. 우리도 감사의 표시로 한국서 준비해 간 전통복장을 한 신랑 각시가 수놓아진 핸드폰 고리를 주었다. 선물을 받은 그가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우리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난데없이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선물을 준 남자가 말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미안해요. 저 사람 미친 사람이에요.”
선물을 주었던 남자가 다가와 사과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을 아이들이 걱정되었기에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두 남자가 심하게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사뭇 궁금했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데리고 가는 게 급선무였다. 다리를 건넌 후 공원에 짐을 풀었다. 공원 잔디밭 위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들이 웃으며 태권도의 발차기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빠, 저 형 누나들 태권도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같네. 너 태권도 일품이지? 네가 가서 시범 보여 주고 와!”
“에이, 그건 좀......”
조정 경기를 하고 있는 듯, 몇 개의 배가 강 위를 미끄러지듯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조금 전 잠시 소란은 있었지만, 한없이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평화로운 바욘 마을
겨울 산티아고 순례 길에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알았지만 오늘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생장행 버스 승객 중에 등산 배낭을 멘 사람은 우리를 제외하고는 여자 한 명뿐이었다. 버스는 기차 대신으로 배차된 것을 티라도 내 듯 기차역 하나하나에 빠짐없이 정차했다. 결국, 버스는 출발 후 한 시간 반 정도 지난 오후 여덟 시 정도가 되어서야 목적지인 생장 역에 우리를 뱉어내었다.
생장 역은 우리네 시골 간이역 같이 작고 소박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봐서 더욱 그러했는지 몰랐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 지도를 켰다. 어둠 속에서 낯선 시골길을 아이들과 찾아 나서려면 구글 지도가 필요했다. 조금 걸어가니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순례객으로 보이는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게시판에 붙은 지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스마트 폰 지도를 보여주며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럭저럭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거대한 성곽 입구가 보였다. 성곽 입구를 중심으로 불 켜진 상점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이곳이 마을 중심가인 모양이었다. 순례자 사무소를 찾기 위해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우리와 순례자 사무소까지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잠시 당황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순례자 사무소가 아닌 숙소부터 들러야 하는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십 여 분 정도를 어둠 속에서 헤매다 마침내 파란 바탕 위에 노란색 조개껍데기가 그려진 순례자 표식을 찾았다. 무거운 나무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뜻밖에도 조금 전 우리와 헤어졌던 그녀가 순례자 여권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올 거면 온다고 얘기나 해 줄 것이지.’
그녀에게 어색한 인사를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섭섭한 마음이 남았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봉사하는 나이 지긋한 부부가 편안한 웃음으로 내 떨떠름한 마음을 풀어주었다. 남편이 나와 아이들의 순례자 여권 발급을 해 주는 동안, 부인은 내겐 따뜻한 커피를, 아이들에겐 시원한 물과 쿠키를 주었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에 나왔던 그런 왁자지껄한 순례자 사무실의 분위기는 여름의 것인 모양이었다. 늦겨울, 사무소의 저녁 분위기는 사뭇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조개껍데기로 만든 순례자 표식과 순례자 여권을 받아 든 우리는 인근에 위치한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로 향했다.
알베르게 역시 순례자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놀랍도록 한산했다. 투숙객은 세 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두 명은 한국 사람이었다. 겨울에 순례길을 떠나는 사람은 한국사람 아니면 스페인 사람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 역시 오늘 처음 만난 것이라고 했다. 한 명은 영국 한인민박에서 일을 하다가 유럽 여행 중인 대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한국서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탐색 중인 젊은 청년이었다. 특히 벤처기업에서 애플리케이션 개발업무를 담당했었다는 젊은 청년은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틈틈이 봉사활동도 하는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는 내게 이번 여행이 아이들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말은 긴장과 피로로 의기소침해 있던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도미토리 객실의 한방 가득 빼곡히 놓인 침대가 아이들에게는 낯설고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삐걱대는 이 층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 동안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치던 아이들은 내가 빨래를 마치고 돌아올 쯤에서야 코를 골기 시작했다. 새벽 무렵 이층에서 자던 혁우는 무서운 꿈을 꾸었는지 침대에서 내려와 내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혁우를 재우려고 등을 두드리는 내 손이 천근만근 무거웠다.